박기철 교수
박기철 교수

 

한때 동아시아는 유럽 사람들에게 이상향의 세계였다. 동방의 어딘가에 황금의 나라인 엘도라도(Eldorado)라는 낙원이 있을 것이라고 동경하기도 했고, 또 그곳에는 후추와 계피 같은 향신료의 군락지가 있어 자유롭게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동경과 믿음이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서구 사람들을 대항해의 모험으로 인도하여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게 하는 ‘지리상의 발견(Geographical Discovery)’으로 이어졌다. 대항해의 성공으로 지중해 중심의 무

박종우 교수
박종우 교수

역이 대서양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서구 국가들은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많은 국가들을 식민지로 삼아 거점을 만들고 상업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무역이 확장됨에 따라 상업 방면에서 일대 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이 대규모 사업에 자본을 공동으로 출자하는 ‘주식회사’가 만들어지고, 은행 기관은 더욱 정교해져 외환 지표와 어음이 출현하는 등 ‘금융의 혁신’이 이루어졌으며, 화폐 중심의 ‘시장경제’가 확산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상업혁명(Commercial Revolution)’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 상업시대의 대표 주자가 바로 영국의 ‘동인도회사(The East India Company)’였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1600년 12월 31일에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특허장(Charters)’을 발급받았는데, 이 특허장은 동인도회사만이 동인도 지역에서 무역 독점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인도회사의 선박은 1601년 2월에 런던을 출발하여 인도로 향하였다. 동인도회사는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 등의 수많은 상품을 영국으로 수입하고, 반대로 영국 제품을 아시아에 수출했다. 동인도회사는 상당한 군사적·정치적 권력을 행사하였는데, 자체 군대를 보유하고 식민지에서 정부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도 갖고 있었다.

1760년부터 영국에서는 상업혁명의 시대가 저물고 바야흐로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이 시작하여 공업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던 제품을 기계로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계를 통한 대량생산은 거대 산업자본가를 출현시켰다. 막대한 자본을 내세운 산업자본가의 출현으로 기존 질서에서의 기득권자인 상업자본가와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산업자본가들은 국제무역에 뛰어들었으나 동인도회사가 가지고 있던 무역 독점권으로 인해 자유로운 무역에 제한이 많았다. 그러나, 이후 산업자본가의 활동으로 1813년에 이르러서는 동인도회사의 인도 무역 독점권이 말소되고 동인도회사의 무역 독점권은 중국으로 한정되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청나라의 공식 대외무역항인 광둥(廣東)에 정박할 권리를 얻은 것은 1713년이고, 차를 정기적으로 선적하기 시작한 것은 1717년 무렵이다. 이후부터 영국에서는 차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수출하고자 하는 제품인 모직과 면화는 중국에서 수요가 극히 적었던 반면, 영국이 수입하고자 하는 차, 생사(生絲, raw silk), 도자기의 수요는 계속 증가하여 무역 적자를 면치 못하였다. 동인도회사는 무역항을 늘리면 이러한 무역적자를 해소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한편, 영국 내의 산업자본가와 자유 무역 상인들은 동인도회사가 중국에서의 무역 독점권을 가지고는 있는 것이 불만이었다. 이들은 영국 정부에 동인도회사의 중국 무역 독점권을 폐지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정부는 1792년 광둥체제를 개선하기 위해서 중국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게 된다. 동인도회사의 중국 무역에 대한 독점권은 한참 후인 1833년에 폐지되었다. 1833년 이후부터는 자유 무역상이 중국 광둥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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