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몸에 이상이 있어 병원을 찾았다. 내과에서 복부 ct 조영촬영과 각종 검사와 함께 엄지손가락 사이 혹이 커지고 있어 두 가지 검사를 동시에 진행했다. 

종일 검사와 기다림, 수납과 이동으로 지친 가운데 신경 종양으로 판명된 손가락 혹 수술이 결정되어 입원을 했다. 간단한 시술 정도로만 생각하여 아무 준비 없이 왔다가 수술대 위에 누워 수면 마취로 잠이 들었다.  

백색 병실 침상에 옮겨져 있다가 눈을 뜨니 손에 붕대가 칭칭 두껍게 손목까지 감겨 있었다.  쇄골로 주입한 마취가 풀리지 않아 한쪽 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옆 침대 아주머니가 다리 수술을 받아 남편이 간호를 하셨다. 

통증이 오면서 괴롭기 시작했다. 신음을 내지 않고 참고 있으려니 시간이 지루하고 외로운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허기가 몰려왔다.

종일을 굶었으니 물이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통증, 허기, 외로움 이 세 가지 외에도 무언가 느껴져 생각하니 고립이었다.

일박의 하룻밤이 몇 날 같이 여겨졌다. 다른 두 환자가 들어왔다 수술실로 가고 오고, 왠지 사람 사는 동네가 아닌 것 같이 보여 창밖을 보았다. 

어둠 저편 편의점 불빛과 차로 차등이 빛날 뿐 병실은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같은 사람인데 한 번씩 드나드는 병동 간호사도 다른 부류란 생각이 든다. 

친구의 언니는 뇌출혈로 6년을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니며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긴 세월 병실에 누워 점점 나빠지는 자신을 지켜보며 떠나간 그녀의 쓸쓸하고 외로운 고립과 맞물린다. 

보통의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지 지독한 답습을 한다. 입장이 되어 보아야 우리는 뼈저리게 인생 한 수 배우게 된다.

알고 보면 우리는 가족이 있어도 단절과 소통의 부재로 산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가족만이 아닌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하다. 부재론의 심화는 소외와 고립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스스로가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이 외로움 속에서도 배는 고프고 통증도 깊고 일어나 움직이는 일도 어렵다. 코로나로 병원 출입이 허용되지 않아 밤새 고립무원에서 허덕여야 한다.

참 얄궂게 전화기도 조용하다. “나, 병원에 있어요”라고 주변에 전화를 건다. 철저히 고립되어 돌아와야 하는데 세상과 병행할 구실을 찾는다. 

간호사가 조카가 사다준 죽과 딸기우유를 건네주었다. 너무 고맙고 행복해서 울며 떠먹는 한 입에 백색 소음이 환해진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규제된 공공 구역인 병원에서 하룻밤보다 깊은 사상을 태우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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