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학의 오류 중에 ‘후건 긍정의 오류’가 있다. 기호로 나타낸다면 이렇다. “①P이면 Q이다. ②Q이다. ③그러므로 P이다.” 언뜻 보면 맞는 말 같아 보지만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①감기에 걸리면 기침이 나온다. ②기침이 나온다. ③그러므로 감기에 걸린 것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기침이 나온다고 모두가 감기가 원인일까? 그렇지 않다.

감기가 아닌 다른 질병 때문에도 기침이 나올 수 있다. 결과가 같다고 모두 원인이 같다는 보장은 없다. 심각한 질병에 걸려서 기침이 나오는 데도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 보지도 않은 채 감기약만 먹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큰 병인 줄 모르고 있다가 치료 시기를 놓치고 손쓸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사람의 사고판단 전반에 후건 긍정의 오류는 영향을 준다. 성경 욥기를 보자. 욥은 매우 부유하고 많은 자녀를 거느린,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말 그대로 다복한 가정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큰 불행이 그에게 닥쳤다. 자녀들이 사고로 모두 죽고, 가졌던 재산도 자연재해와 약탈 등으로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참한 불행을 당한 욥에게 친한 친구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다. 그들은 큰 슬픔에 젖어 넋이 나가 있는 욥 곁을 잠자코 지켰다(욥기 1장).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욥은 자기 처지를 비관했다. 차라리 태어나지나 않았더라면 이런 슬픔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한탄을 뱉어내었다(욥기 3장). 그러자 그동안 욥 곁에서 잠자코 앉아있던 친구들이 발끈하며 한마디씩 하고 나섰다. 그 이야기가 욥기 4장부터 31장까지 매우 많은 장을 할애하여 욥의 친구들의 공격과 욥의 반박의 형식으로 계속된다.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각자 말하는 뉘앙스는 차이가 나지만 동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환난을 겪는 욥에게는 분명 숨겨진 큰 죄가 있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벌하신 결과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욥은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에게 책잡힐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그러면 또다시 친구들이 번갈아 가면서 욥을 책망하고 정직하게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한다. 이것은 후건 긍정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①하나님은 악을 심판하시기 위해 재앙을 주신다. ②욥이 재앙을 만났다. 그것도 우주 크고 심각한 재앙이다. ③그렇다면 욥은 이에 상응하는 큰 죄를 지었음이 틀림없다.”

엘리바스는 자기 논증의 정당성을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일반적인 지혜에 호소한다. “네게 가르쳐 줄 것이 있으니 들어 보아라. 내가 배운 지혜를 네게 말해 주겠다. 이것은 내가 지혜로운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이고, 지혜로운 사람들도 자기 조상에게서 배운 공개된 지혜다”(욥 15:17-18).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즉 옛 성현들의 맞는 말씀으로서, 다 인정할 수 있을 만한 공개된 지혜라고 한다.

그러나 인생이 그렇게 간단한 것인가? 보통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만 가지고 열을 다 판단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 주위를 보면 자기가 가진 판단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아주 쉽게 판단하는 경우를 본다. 결과를 보고 원인을 너무 쉽게 판단해 버린다. 자기 주변 신자가 어려움을 당하면 단박에, “그것 봐 기도 안 해서 그래”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믿음과 확신을 가져도 눈에 보이는 결과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는 천편일률적인 방식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형태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도록 작동한다.

다른 사람의 삶에 함부로 내 생각의 잣대를 들이밀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무기로 삼아서 각 사람의 특수한 예들조차 도매금으로 넘기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좀 더 경청하자. 섣불리 말하려 하기 전에 충분히 듣는 연습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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