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우 교수
박종우 교수

1616년 여진족(女眞族)의 후손인 누르하치(1559~1626)가 만주(지금의 동북지역)에서 후금(後金)을 세웠고 1618년부터 명나라와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1626년 누르하치 사망으로 그의 아들인 홍타이지(1592~1643)가 왕좌에 올랐고, 1636년에는 황제로 칭하면서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개명하였으며 선양(沈陽)을 수도로 삼았다.

1643년 3대 황제인 순치제가 즉위하고 그 이듬해인 1644년에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

박기철 교수
박기철 교수

징으로 진군하여 명을 멸망시키고 중국 전역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베이징 진입 이후에도 중국 남방에서는 ‘반청복명(反淸復明: 청을 물리치고 명을 다시 세운다)’의 기치를 내세운 명나라 잔존 세력의 저항이 거셌는데 정성공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해군이 주력이었던 정성공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는 1656년에 해금령을 실시하여 그 목표를 달성하였고, 1683년에 이르러서야 해금령을 해제하고 주민이 해안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해금령이 풀리자 인도양에서 활동하던 유럽의 상인들이 광저우, 마카오에 물밀듯이 몰려들어 이 지역 일대의 대외무역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청나라는 순치제(재위1643~1661) 이후 강희제(재위1661~1722), 옹정제(재위1723~1735), 건륭제(재위1735~1795) 3대 130여 년간 태평성세의 최전성기를 누린다. 만주족의 청나라는 중국을 통치하면서 한편으로는 한족 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한편으로는 한족 문화에 빠르게 동화되어 갔다.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청나라 역시 중화사상에 기반한 황제지배체제와 조공무역을 그대로 유지했던 것이다. 중화사상은 세계를 문명화된 중화세계(중국)와 비문명화된 오랑캐 세계로 이분하고, 중국에 대립하는 문명국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 세계관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중화사상은 중국의 황제만이 최고의 지존이고, 다른 국가들과의 교역은 대등한 무역관계가 아니라 불평등한 조공무역의 관계임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조공무역은 유럽 상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다만, 당시 전통적인 조공국이었던 조선, 류큐, 베트남 등의 경우와는 달리, 유럽 상인에 대해서는 지역, 시간, 방법 등을 상세하게 구분하여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당시 조공무역이 가능한 곳은 광둥성의 월해관(粵海關), 푸젠성의 민해관(閩海關), 저장성의 절해관(浙海關), 장쑤성의 강해관(江海關) 4곳으로 제한하였다.

해금령이 풀리자 유럽 상인들은 경쟁적으로 중국의 시장을 확보하고 확대하기 위해 엄격한 조공무역 규정을 어기는 일이 발생하였다. 1757년 영국 상인 제임스 플린트가 청국 당국의 허가없이 절해관이 있는 닝보(寧波)항에 무단으로 입항하여 교역을 요구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중화사상에 기반한 청나라의 세계관으로 보면 유럽상인의 이러한 태도는 황제의 은혜를 무례함으로 갚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에 따른 응분의 댓가를 감수해야만 했다. 

제임스 플린트 사건 이후 청나라는 외국상인과의 교역 장소를 광저우 한 곳으로 한정했다. 이른바 ‘일구통상(一口通商)’ 시기가 된 것이다. 게다가 상품 거래는 반드시 청나라 상인인 ‘십삼행(十三行)’을 통해야만 가능했다. 십상행은 당시 청나라 최대 상인 집단인 후이상(徽商)과 진상(晉商) 다음가는 3대 상인집단으로 일구통상 시기 이후부터 대외무역을 독점하여 엄청난 부를 창출하였고 근대 시기 남중국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세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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