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교수
박기철 교수

 

명나라(1368~1644) 4대 황제인 영락제(재위 1403~1424)가 정화에게 7번의 원정(1405~1433)을 명한 데에는 경제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몽골족의 원나라(1271~1368)를 멸망시킨 주원장(朱元璋, 재위 1368~1398)은 원나라와는 달리 국가 간 무역 중심이 아닌 농업 중심의 폐쇄적인 국가 운영을 지향하였다.

농업 중심의 국가 운영은 원나라 때 구축했던 대륙 간 육로 무역을 쇠퇴시켜서 이 육로를 통해 유입되었던 서남아시아와 동남

박종우 교수
박종우 교수

아시아의 물품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당시 명나라는 지폐가 아닌 은을 기반으로 하는 통화체제로 전환하였는데 이로 인해 중국에서 은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물품의 공급과 은을 충당하기 위해서 그 활로를 해양 즉 대외무역에서 찾았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정화의 함대에는 무엇을 실었을까? 중국에서 가져가는 품목은 자기, 비단, 칠기, 예술품, 면직물, 철, 소금, 대마, 차, 술, 기름, 양초 등이고, 원정지로부터 가져오는 품목에는 상아, 코뿔소의 코, 거북껍질, 목재, 향료, 약품, 진주, 보석 등이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목적 외에도 주변국들을 명나라의 조공국으로 삼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1424년에 명나라는 67개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7차 원정 이후 명나라는 대항해를 중단했다. 영락제 사후에 명나라 조정은 문관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었는데, 문관은 막대한 비용이 드는 원정에 반대하면서 그 돈을 제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몽골을 제압하는 데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원양 항해를 위한 모든 배의 건조와 수리가 금지되었고, 몽골족과 같은 국경 지대 이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인도양을 지배했던 세계 최강의 중국 해군은 더이상 인도양의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일본의 해적과 서구의 국가들이 인도양을 차지하게 되었다.

폐쇄적인 국가 운영을 한 명나라가 1644년 만주족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청나라(1644~1911)로 대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에 맞서 명나라를 다시 재건하고자 하는 ‘남명(南明)’ 정권이 수립되었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정지룡(鄭芝龍 1604~1661)이다. 그는 중국 동남해의 타이완 해협을 장악한 해적 집단의 우두머리로 해협의 제왕으로 불렸는데 남명 정권에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해군의 수장인 제독이 되었다.

그러나, 정지룡은 2년 후에 남명을 배신하고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정지룡의 뒤를 이어 남명 정권에 충성한 인물이 바로 정성공(鄭成功 1624~1662)으로 정지룡의 아들이다. 정성공은 22세에 반청운동의 지도자가 되고 30세에 남명의 왕으로 책봉되었다. 해군에 기반하여 저항하는 정성공을 무력화 하고자 청나라는 1656년에 해안을 원천 봉쇄하는 이른바 ‘해금령(海禁令)을 시행하였다.

해금령의 시행으로 주민은 해안으로부터 15~25km 내에는 거주할 수 없게 되었고, 바다도 청나라로부터 멀어졌다. 해금령은 정성공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해안으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을 수 없던 정성공은 타이완을 거점지로 선택하였다. 1622년부터 네덜란드가 점령하고 있던 타이완은 1662년에 정성공의 수중에 들어갔고 그후 1683년에 청나라에 정복되었다. 이로써 해금령도 해제되었지만 유목민 출신인 만주족이 통치하는 청나라는 더 이상 바다를 중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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