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철 교수
박기철 교수

 

중국이 서양으로 인한 침략을 받게된 가장 큰 이유는 명청 시기에 해양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모하지 않은 것에서 기인한다. 유럽 국가들이 이미 15세기부터 국제 정치나 지역 간 관계에서 자신의 영토나 영향력을 확장하고 강대한 국가로 성장하려고 시도한 점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포르투갈은 15세기 후반부터 새로운 항로의 발견을 통해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탐험하고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에 콜럼부스가 발견

박종우 교수
박종우 교수

한 신대륙, 즉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바로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하였다. 네덜란드는 17세기 초기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Dutch East India Company)와 서인도회사(Dutch West India Company)를 통해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서 식민지를 확장해 나갔고, 이로 인해 흑해 일대의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금융 및 상업 중심의 대국이 되었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3국과 달리 영국이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미친 기간은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가장 광범위하고 오래 지속되었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영국은 아메리카와 흑해를 식민지화하였으며, 해군을 확장하여 해상 교역을 보호하였다. 1600년에는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보다 2년 빠른 것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에서의 영토 확장을 시도하였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스페인과 네덜란드와의 경쟁과 충돌에서 승리함으로써 우위를 차지하였다.

이후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제국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키면서 식민지를 아프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메리카 등 다양한 지역으로 확대하였다. 이 시기 영국은 국제 무역, 기술 혁신, 해군의 우위, 공업화, 금융 중심의 경제와 문화적 영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렇듯 아편전쟁이 발발하는 19세기 중반 이전의 국제 정세는 다양한 국가 간의 갈등, 제국주의의 성장, 열린 문화와 경제의 전환, 그리고 국제 무역과 협력의 증가가 경쟁적으로 일어나는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중국은 국제사회 변화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역사적으로 해양진출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명나라 시기에는 서구의 어느 국가보다 월등한 선박 건조 기술과 항해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에 걸맞는 해군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를 증명하는 사건이 바로 ‘정화(鄭和, 1371~1435)의 대항해’이다.

정화의 대항해는 1405년 첫 항해를 시작으로 1431년 7차 항해까지 이루어졌다. 1차 항해에서 317척의 범선(帆船)에 27,870명을 태우고 인도네시아와 말라카해협을 거쳐 인도양으로 향했다. 그 이후의 항해에서는 동아프리카까지 항로를 확장하였다. 범선이기에 계절풍의 방향에 의존하여 항해해야 했으므로 출발에서 귀국까지 한 번의 항해는 대체로 2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원정에 동원된 범선의 주축은 2천 톤급으로 62척이나 되었다. 이 배는 길이가 122m에 너비가 50m나 되었고, 9개의 돛대와 4개의 갑판을 보유하고 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는 1세기 후에 포르투갈이 인도양으로 항해할 때 운용했던 가장 큰 배보다 7배나 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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