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인 목사
김학인 목사

 

‘N’이라는 자매가 있다. 20여년 전 내가 부목사로 부임해간 교회의 청년이었다. 그 자매의 가정에는 오랜 시간 깊은 상처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콜중독자였다. 성장기에 줄곧 보아온 아버지는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서 온갖 행패를 부리는 그런 아버지였다.

심지어 고3 수능 시험을 치르기 전날에도 술에 취해 들어와 밤새도록 온갖 소란을 벌이는 바람에 다음날 울면서 시험장에 가야 했다. 자매는 간호대학에 입학했다.

청년부를 담당하고 있던 내가 그 자매를 만났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술에 취해서 길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그 아버지를 집에 부축해서 데려다준 적도 몇 번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아버지를 좋아할 리 없었다. 소리 소리 지르며 시끄럽게 하는 통해 여러 번 파출소에 신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 소식은 교회에도 들려왔다. 점점 알콜중독 증세는 심해져 갔다.

그 아버지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교회에 다녔기에 여러 번 권면을 했었다. 더 망가지기 전에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를 받으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비록 술에 취하면 인사불성이 되고 난장판을 벌였지만, 깨어 있을 때는 그나마 멀쩡했고, 그가 건설 기술자로 일해서 번 돈으로 가정의 생활을 책임져 왔으니 말이다. 당장 몇 개월 병원에 입원하면 병원비는 차치하고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했다.

자매가 겉으로 잘 표현은 안 했지만 말하지 않아도 매일 고통 속에 살아가는 그 심정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학대하고 괴로워한다는 것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버지도 아버지이지만, 그런 속에서 견디어 내야 하는 두 자매가 걱정이었다. 혹여라도 자기 삶을 비관하지는 않을까, 자포자기하거나 비뚤어지지는 않을까.

자매는 음악에 소질이 있어 교회 찬양팀에서 활동했고, 복음성가 경연대회에 나갈 만큼 실력이 있었다. 또한 신앙심도 깊었기에 나는 자매가 음악 재능을 가진 간호사가 되어 그간 받아왔던 상처를 녹여 세상의 상처받은 영혼들을 돌보기를 바랐다.

더 나아가 자매에게 이런 권면을 했었다. 왜 그런 가정에서 태어나야만 했는지, 왜 그런 아버지를 만나야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라도 자매 자신을 위해서라도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말이다. 상처를 준 아버지였지만 오히려 그를 돌보고 치유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참 쉽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여 이제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또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자로 서기를 바랐던 것이다.

간호사가 된 그 자매는 고된 병원생활로 여러 병원을 옮겨 다니며 고생했다. 그 자매는 상냥하고 아이들을 좋아했다. 그래서 학교 보건교사를 준비해보라고 권면했지만 반응은 미지근했다. 나는 그 교회를 사임하고 교회를 개척해서 다른 지역으로 왔다. 가끔 소식을 전해오기도 했지만 10여 년간은 연락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러다 최근 정말 오랜만에 예전 지도했던 몇 청년들과 통화를 했다. N자매와도 통화를 했다. 통화를 하자마자 덜컥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리고 올해부터 보건교사로 임용되어 초등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그 자매가 제자리를 찾아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사도바울은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으로 바르게 서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쁜 소식’이라고 했다(살전 3:6). 그리고 그 소식이 자기에게 큰 위로가 된다고 했다(살전 3:7). 과거의 아팠던 상처를 딛고 일어서서 이제는 상처받은 치유자로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며 살아간다는 기쁜 소식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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