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희 작가
유영희 작가

 

상현달이 부드럽고 은은하게 퍼지는 밤이다. 달이란 이름은 얼마나 고운가.

지구에서 달을 바라볼 때 육안으로 보이는 것이 달토끼, 일명 방아 찧는 토끼 형상이다. 어쩌다 무심히 보아도 그리 보인다. 달의 표면은 크레이터crater, 즉 움푹 파이거나 솟거나 하며 모양도 제각각인 지형으로 사전적 의미를 빌려 말하자면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위성이며 우주적 생명력을 가지게 하는 종교적 상징도 있다.

시골 태생이라 청정하늘의 원대하고 거대한 우주에 휩싸여 살았다. 별이 쏟아지는 밤을 보고 자랐으니 정서적 축복이 가득했다. 별을 세는 일은 무의미하여 낮은 흙담장이 있는 골목을 달밤에 뛰어다니다 허기지면 설익은 개구리참외를 베어 먹곤 했다. 이러한 어린 시절을 대변하는 조지훈의 <달밤>시는 가물거리는 정서를 잊지 않게 한다.

”순이가 달아나면, 기인 담장 위로 달님이 따라 오고,/ 분이가 달아나면, 기인 담장 밑으로 달님이 따라 가고/ 하늘에 달이야 하나인데 순이는 달님을 데리고 집으로 가고/ 분이도 달님을 데리고 집으로 가고“, 이런 배경들이 시를 그려가는 나의 시적 울력은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젊은 날은, 가부장적인 가장들은 소작농이 아니면 일거리라 많지 않은 시대였다. 철철이 몸으로 때워야만 근근이 어린 자식들과 풀칠하는, 오로지 사는 일은 굶지 않기 위해 사는 막연한 날들이었다. 엄마는 고단했지만 자식을 먹이며 사는 일에 불만이 없는 무심의 모습으로 생을 지고 가는 지게 같았다. 어느 날 한량인 아버지가 약주에 취해 달과 별이 환하게 빛나는 코발트 블루 하늘 아래에 서성이고 계셨다. “아부지요, 엄마 어디 갔어요,”라고 울먹이며 묻자 “넘마(너 엄마) 도망갔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아부지 모습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달같이 포근한 엄마라는 존재가 사라진다는 것은 달과 나의 거리만큼 아득한 슬픔이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달의 모양이 커지며 차오르겠다. 오늘도 날이 맑으면 어제보다 조금 커진 달을 보겠다. 나의 장점은 언제든 시를 불러와 교교한 달빛과 사유의 언어와 교감하기 좋다는 것이다. 류시화 시인의 <달에 관한 명상>이란 짧은 시 서두와 마지막 부분을 보면 당연하지만 당연함의 바운스를 듣거나 느끼지 못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현대인의 무감각을 깨워주는 시라 할 수 있다.

“완전해야만 빛나는 것은 아니다/ 달을 보라 완전하지 않을 때에도 매 순간 빛나는 달을”, 이처럼 덤덤한 철학이 있던가. 이번 추석은 반가운 손님이 온다니 전을 부치고 달달한 감주도 달여 모처럼 솔잎도 얹어 송편도 쪄야겠다. 달처럼 환한 얼굴들과 만월의 기쁨을 달의 온기로 받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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