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인 목사
김학인 목사

인터넷 포털 네이버에는 평택 시민들 중심으로 인근지역까지를 아우르는 인터넷 카페 모임이 있다. 6만 명에 근접하는 회원을 가졌으니, 평택을 대표하는 카페라 할 만하다. 유용한 정보 교류와 회원들끼리의 친목 도모가 활발한 카페다.

종종 그 카페에는 무료 나눔을 한다는 글이 올라온다. 그런데 어떤 회원이 무료 나눔이 있을 때마다 선수를 쳐 기회를 독차지하는 바람에 회원들이 문제 삼은 적이 있다. 여러 사람에게 골고루 기회가 제공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독점하다시피 한 것에 대한 지적인 셈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적극적으로 잘 받아들인다. 심지어 당장 필요가 없음에도 일단 도움을 받고 보는 사람도 있다. 공짜라는 의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면 다른 사람을 자기가 도와줄지언정 자신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을 어색해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도움을 받으면 다른 사람의 기회를 뺏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서로가 주고받는 일을 통해 더 친근해지고 함께 한다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된다. 일방적이기보다 쌍방적인 관계가 더 건강하다. 그래서 때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기쁘게 감사하게 받아들일 때 더 관계가 돈독해진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사랑의 빚을 진다’는 말이 무엇일까?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 말라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다른 뜻인지가 좀 혼란스러웠다.

공동번역성경이 이 구절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밀린 외상값은 갚아야 하고, 남의 권리를 침해한 일이 있다면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태만(怠慢)이다. 공동체에서 내게 맡겨준 일을 태만하게 하면 공동체 전체에게 피해를 준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아무리 해도 다 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다고 한다. 바로 사랑의 의무이다.

다른 것으로 빚지지 말되 사랑에 빚진 마음은 언제나 가져도 좋다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지켜야 할 계명의 수를 613개로 보았다. 그중 248개는 무엇을 하라는 계명이고, 365개는 무엇을 하지 말라는 계명이다.

이런 수많은 계명이 다 사랑 안에 들어있다는 말씀이다. 계명들이 결국 지향하는 것은 사랑인 셈이다. 그래서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다고 말씀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사랑이 없이 의무감으로라도 규칙은 지키며 사는 것이 옳다. 사랑의 본심이 없으니 그럴 바에 규칙을 안 지키고 살겠다는 태도는 핑계에 불과하고 뻔뻔한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없이 법으로만 운영되는 사회란 회색빛 사막처럼 삭막하다. 책임과 의무감으로만 굴러가는 사회라면 결국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리기 쉽다. 사랑은 책임감과 의무감을 넘어서서 일하게 한다.

‘깎아내린다’라는 말이 있다. 헐뜯어서 그 가치에 해를 입히는 것을 말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서로를 깎아 세울 수 있다. 상대방이 더 성장하도록 단점이나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해 주는 것이다. 단점을 지적하더라도 사랑의 동기인지 아닌지에 따라 그 방법과 결과는 달라진다.

서로 주고받기를 통해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며 함께 성장하는 것이 아름답다. 사랑과 배려의 주고받기는 관계를 더 끈끈하고 돈독하게 한다. 피차 사랑의 빚지는 관계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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