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인 목사
김학인 목사

필자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시골에서 학교에 다녔다. 그때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고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숙제해간 기억이 별로 없다. 무엇에 정신이 나간 것일까? 노는 것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밤늦게까지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가는 것이 일과였다.

오죽하면 화가 난 아버지의 심한 매질로 아파서 학교를 빠지기도 했다. 3학년과 4학년 연거푸 담임이셨던 여선생님은 나에게 화가 나서 퇴학시키겠다고 협박했던 기억이 있다.

좀 불량했던 동네의 형들 따라다니면서 가게 물건을 훔치기도 했고, 소위 비행 청소년이 할만한 짓들을 초등학교 저학년 때 많이 했다.

그런데 갑자기 초등학교 5학년 때 도시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면 소재지였던 그곳에서 음식점으로 성공해서 큰돈을 버셨는데, 과로로 인해 건강에 위험 신호가 와서 모든 것을 접고 이사를 결정한 것이다. 또한 자녀교육 문제도 결심의 한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갑자기 진공상태가 된 느낌이었다. 모든 익숙한 환경을 뒤로하고, 더구나 매일 놀던 친구들을 다 뒤로한 채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 자신감을 잃었다.

이사 간 곳은 도시 외곽이었는데, 아직 초등학교 건물이 완공이 안 되어 다른 초등학교에 더부살이했다. 매우 불규칙하고 불안정한 학교생활이었다. 부모님은 공장을 차리시는 바람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눈코들 새 없이 바쁘셨다. 집안을 돌볼 여력이 없으셨다.

점점 나는 내성적인 성격이 되었고, 집에 처박혀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마 그때 교회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요즘 표현처럼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후 청소년기도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그로 말미암은 여러 갈등과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우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런 우울한 나날들을 보내는 동안 미숙하고 어렸지만 나는 하나님을 더 의지하기 시작했다. 사색하고 책을 읽는 시간도 더 많아졌다.

대학 입학 후부터 여러 가지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목회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신학대학원에 들어가서 결국 목회자가 되었다. 고비마다 힘든 시간도 있었는데, 돌아보면 그 모든 시간이 뜻 없는 시간이 아니었다.

얼마 전 시골에서의 초등학교 4학년까지의 생활을 회상해 본 적이 있다. 만일 그때 이사 안 가고 그냥 그 시골에서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과거에 대한 가정은 부질없겠지만, 우스갯소리로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한 말이 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시골에 산다고 다 불량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후 도시에 올라와서의 삶조차도 결코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니었다. 신자의 삶에 우연이란 없다. 자비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 나를 빚어온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낙심할만한 상황을 만나서 고민이 깊어진 시간이 오히려,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고후 1:9)을 배우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집에 돈이 너무 많아서 돈 귀한 줄 모르고 친구들과 흥청망청 써버렸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아버지의 거듭된 사업 실패로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기에, 돈이 없어서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없음이 오히려 나를 지켜주었는지도 모른다.

사도 바울은 자기 삶을 회상하면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했다(고전 15:10). 나의 장점이든 약점이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성공이든 실패든 그 모든 것이 합하여 결국 선을 이루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완전한 절망이란 없다. 과거의 회상이 은혜에 대한 감사로 끝을 맺었다.

저작권자 © 평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