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親密)은 아주 친하고 밀접한 것을 말한다. “가까운 사이, 친한 사이”와 맥을 같이 한다. 이 말은 관계적이다. 사람 사이가 아닌 것에서 이 단어를 사용할 때조차 그렇다.

“우리는 잘 아는 사이야!”라는 말에는 보통 오랜 시간 알아 왔으며, 서로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음이 묻어난다. 익숙함, 그리고 편안함이 이 말에 숨겨져 있다. 

그런데 때로 그런 익숙함, 가까움이 오히려 상대방을 소홀하게 대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굳이 의식하고 그런 것이 아니지만, 언제나 내 입장을 다 이해해 줄 것처럼, 그 사람은 항상 내 편인 것처럼 치부해 버린 것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나 남들에게는 깍듯하고 배려를 잘하는 사람이, 정작 늘 가까이 있고 함께하는 사람들을 소홀히 하고 무례할 수가 있다. 형식적 친밀함에 속지 말고 진정한 친밀함이 되게 해야 한다.

상대방은 지금 나와의 관계를 깨트리지 않기 위해 적당히 넘어가고 참아주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반복되고 오래되면 그 친밀함은 서서히 금이 가고 상처가 생긴다. 친밀한 관계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TV 만화영화 시리즈 <스펀지 밥>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에 이런 게 있다. 스펀지밥은 자기가 갖고 싶었던 그림 카드를 친구인 뚱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 부러웠다. 그러자 뚱이는 이 카드가 그렇게 좋으면 가지라고 스펀지밥에게 선뜻 내주었다. 스펀지밥은 놀라서, 정말 이 소중한 것을 나에게 주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이때 뚱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친구한테 하찮은 걸 줄 순 없잖아”. 친구니까 나의 소중한 것을 준다는 것이다. 

소중한 관계는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일에 대한 헌신보다 관계에 대한 헌신이 더 중요하다. 나중에 만회하기 어렵고 후회해 본들 소용이 없다.

부모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은 많아 남았다고 미루지 말 일이다. 배우자나, 자녀들과 오늘 친밀하지 못함이 나중에 메꾸어질 수 있다고 과신하지 말라. 영영 그런 기회가 안 올지도 모른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잘 챙기고 친밀함을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자산이다.

신앙생활의 본질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우정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한 관계이기를 바라신다. 성경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라고 말씀한다(시 25:14).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원하신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바로 이 친밀함, 화목함을 위한 값비싼 대가지불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하나님은 우리와 화목하고 친밀한 관계가 되기 위하여 성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의 길을 자원하여 걸어가신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그야말로 신자들과 늘 함께하여 돕는 친구이다. 위로와 격려, 믿음과 확신, 힘과 용기가 그에게서 온다. 성령의 별명은 다양하다. “돕는 자, 상담자, 위로자, 변호자...” 모두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성경이 말하는 삼위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친밀한 관계를 나누기 원하신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우정관계라고 말한 것이다.

소외되고 삭막한 세상에서 누군가와 친밀함을 유지하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가족 친지가, 친구가 그러하고,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그러하다. 소중한 사람들과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에서 소외됨이나 소홀함이 아닌, 친밀함의 복을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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