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1일 대법원에서 한 판결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다. 고인의 유해와 분묘 등 제사용 재산의 소유권을 가진 제사의 ‘주재자’(主宰者)는 서로 협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남녀를 불문하고 피상속인의 가장 가까운 직계비속 중 최 연장자가 맡는다는 것이다. 즉 딸도 제사의 주재자가 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동안의 남성 중심의 가족관계가 점차로 남녀구분의 의미를 두지 않는 사회로 변해간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초저출산의 시대에 접어들었고, 이제는 아들보다 딸이 더 효도한다는 말이 정설처럼 되어버리기도 했다. 예전처럼 아들 낳기에 목매달던 시대가 아니다.

고대(古代) 근동(近東)에서는 관례적으로 남자를 중심으로 상속이 이루어졌다. 이스라엘백성 또한 아들 승계 원칙을 따랐다. 장남은 더구나 다른 상속자들보다 두 배의 권리를 가졌다. 그리고 아들이 없으면 그 유산은 집안의 다른 가까운 남자 상속자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다. 구약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될 때의 일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각 지파와 가문별로 20세 이상의 남자를 계산하여 땅을 분배받을 계획을 세웠다(민수기 26장).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므낫세 지파’의 ‘길르앗 가문’에 속한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다섯 딸들만 남긴 채 죽는 바람에 땅을 분배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민 26:33). 

아버지에게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땅을 분배받지 못하게 된 슬로브핫의 다섯 딸들은 지도자인 모세를 찾아왔다(민 27:1). 슬로브핫의 딸들은 이렇게 탄원했다. “어찌하여 우리 아버지에게 아들이 없다고 해서, 그 이름이 집안에서 없어져 버릴 수 있습니까? 우리 아버지의 친척들에게 재산을 주실 때 우리에게도 재산을 주십시오.”(민 27:4).

그들의 요구는 유산에 대한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문의 기업을 승계하는 것을 매우 귀중하게 여겼다. 그런데 아들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아버지의 유업과 그 이름이 더 이상 남겨지지 않고 사라져 버릴 상황이 되었다. 아들은 없지만 아버지의 유지를 계승하고 싶으니 딸들에게도 기업을 달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들의 동기가 유산에 대한 욕심이었다면, 사람의 깊은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승인을 결코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셨다.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딸에게 돌릴 것이요”(민 27:7-8). 

다만 그렇게 분배받은 땅이 다른 지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슬로브핫의 딸들은 같은 지파 안에서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그것을 성실히 이행했다(민 36:1-12). 모세 때에 정해졌던 이 원칙은, 모세가 죽은 후 그 지도력을 승계한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땅을 분배할 때 실제로 적용되었다(수 17:3-6). 

부모를 사랑하고 섬기고 봉양하는 일에 아들, 딸의 구분이 무슨 소용인가? 아들보다 나은 사위도 있고, 딸보다 나은 며느리도 있다. 반대로 며느리를 딸처럼 귀히 여기는 시부모가 있고, 사위를 아들과 같이 친밀하게 대하는 처가도 있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젊은 나이 과부가 되어서도 극진히 시어머니를 봉양했던 여인 룻이 있었다. 그 룻에 대해 이웃 주민들이 이렇게 칭찬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며느리, 아들 일곱보다도 더 나은 며느리”(룻 4:15). 

유치환의 ‘행복’에 나오는 시어처럼,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이 되어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관계의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다. “너는 너, 나는 나”로 날카롭게 그어진 관계가 아닌 사랑으로 보듬어지고 이어지는 관계가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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