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저 혹은 범수라고도 불리우는 뛰어난 유세가가 있었다. 그는 원래 위(魏)나라 사람으로 병법과 전략이 뛰어났고 다른 인재들과 함께 자신이 의탁할 제후를 찾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교수나 지식인들 중에서 현실정치에 뛰어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범저는 자신의 능력을 알리고 싶어도 그럴만한 돈이 없었고 그래서 위나라의 관리인 수고라는 사람 밑에서 일했다. 수고가 위나라 소왕의 특사로 제나라를 방문했는데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이때 제나라의 양왕(襄王)은 범저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에게 황금과 소고기를 선물로 보냈다. 수고는 제나라 왕의 범저에 대한 선물을 위나라의 비밀을 알려준 댓가로 의심하고 질투하였다. 

이후 사신의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위나라의 제상이었던 위제에게 고자질을 했고 이에 화가 난 위제는 범저가 죽을만큼 매질을 하여 갈비뼈가 부러지고 이빨이 다 빠졌다. 범저가 죽은 척하자 거적에 말아서 화장실 옆에 버려두었다. 또한 위제의 집에 온 손님들은 술에 취해 번갈아 가며 그에게 오줌을 누었다. 

범저는 간신히 목숨이 붙은 채로 자신을 지키던 사람에게 뇌물을 주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정안평이란 사람이 범저를 구출하였고 범저는 이름을 장록으로 바꾸고 숨어살았다. 한편 정안평은 진나라 왕의 관리였던 왕계의 하인이 되었는데 왕계가 위나라에 인재가 있으면 추천해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정안평은 위나라에 장록이란 현인이 있는데 천하의 흐름을 꿰뚫고 있다고 추천했다. 왕계는 범저를 만나 몇 마디를 나눈 후 인재임을 알아차렸고 진나라로 데려가기로 하였다.

진나라로 돌아온 왕계는 범저를 왕에게 소개하였으나 왕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고 대신 숙소와 음식을 내주었다. 

1년이 지난 후 범저는 왕에게 서신을 보냈고 그 내용을 본 진나라 소왕은 크게 기뻐하며 왕계에게 범저를 데려오라고 했다. 소왕은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했으나 범저는 세 번이나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소왕이 자신에게 가르침을 안주는 이유를 묻자 범저는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황실안의 황족과 외척들이 횡행하여 권력을 탐하는데 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범저는 이어서 만약 왕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지 못할 경우 훗날 진나라도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진나라의 소왕은 태후를 폐하고 권력을 남용하던 친인척들을 모두 내쫓은 후 범저를 재상으로 삼았다. 

범저가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으나 이름을 장록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위나라에서는 범저가 이미 죽은 줄로 알고 있었다. 위나라는 진나라가 공격할 것이란 말을 듣고 놀라 범저를 사지에 몰아넣었던 수고를 특사로 파견하였다. 범저는 남루한 옷으로 갈아입고 수고를 만나러 갔다. 

수고는 범저를 불쌍하게 여겨 옷을 한 벌 주면서 진나라의 재상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묻자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통해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다. 결국 수고는 불쌍하게 생각했던 범저가 바로 재상임을 알고 혼비백산했다. 

범저는 수고가 자신에게 저지른 죄는 용서하겠으나 위나라의 왕이 된 위제는 용서할 수 없으니 목을 내놓으라고 했고 이에 놀란 위제는 조나라로 달아나 평원군 집에 숨었다. 그러나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자 자살을 하였고 그의 목을 진나라에 바쳤다. 범저는 진나라 소왕을 도와서 왕권을 튼튼히 했고 조나라의 40만 대군을 패배시키는 등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달도 차는 기우는 범이라고 그는 조금씩 자신에게 예기치 않은 불안한 상황들이 전개되는 것을 간파했다. 이때 그의 친구였던 채택이 그를 방문하여 ‘멈출줄 아는 지혜’를 말해주었다. 그의 말을 듣고 깨달아 그는 재상 자리에서 내려와 낙향하여 삶을 평안하게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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