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많은 만남과 이별을 하게 된다. 그 중에는 좋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또 서로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과 인재를 주위에 둘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 사귐의 가장 좋은 예로 사마천은 위나라의 공자였던 신릉군을 거론하고 있다. 

춘추전국 시기 말엽에 진나라의 세력이 나날이 강해졌고 다른 나라들은 이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진나라가 공격할 경우 이를 막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강호의 많은 인재들을 모집하여 자신들의 활로를 찾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네 명의 공자(公子)들이 있었는데 전국 4대공자(戰國四大公子)라고 불렀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맹상군, 평원군, 신릉군, 춘신군을 들고 있다. 이 네 명의 공자들은 우선 지식인과 책사, 그리고 식객들을 모아 집에서 대접하면서 위기가 닥칠 때 이들의 의견을 모아 사건을 해결하곤 했다. 마치 오늘날 정치 지도자가 자신의 ‘싱크탱크’를 구성하여 다양한 정책과 비전을 만들어내는 것과 유사했다.

그러한 제도가 이미 2000년도 훨씬 전에 있었고 이들은 여러 가지 재주와 지혜를 자신을 챙겨주는 주공(主公)을 위해 사용했다. 

신릉군은 위나라의 유명한 군사가이며 정치가였는데, 그는 위나라 소왕의 막내아들로 당시 위나라 안희왕의 어머니가 다른 동생이었다. 신릉군은 비록 배다른 형제가 왕이 되었으나 진심으로 섬겼고 함께 국가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래서 그는 보다 많은 인재들을 주위에 둘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때 범저가 위나라에서 진나라로 망명하여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그는 위나라 재상 위제에 대한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진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위나라는 진나라와 전쟁을 하였으나 역부족으로 패하고 영토의 일부를 줄 수 밖에 없었다. 

신릉군은 진나라에 비해 위나라의 약한 국력을 걱정하면서 더 많은 인재를 모으는데 힘을 쏟았다. 그는 본성이 어질고 선비와 지식인들에게 예의로 대했다. 또한 선비의 출신이 어떠한가를 묻지 않고 자신이 우선 겸손하게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가 높다고 또 자신이 재산이 많다고 자만하지도 않았다. 상대방이 누구든 항상 예의를 갖추고 상대방을 접했기 때문에 그의 평판은 전국에서 유명해졌다. 

신릉군의 이러한 인품이 소문이 나자 전국에서 서로 앞을 다투어 인재들이 달려왔고 신릉군의 식객이 되기를 청했다. 그 수가 자그마치 3천명에 달했다. 그의 밑에 이렇게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자 다른 제후국들이 감히 위나라를 넘보거나 함부로 공격하지 않았다. 

어느날 신릉군이 위나라의 왕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때 북쪽 국경에서 봉화가 올랐다. 봉화는 통신이 발전하지 않았을 때 외부의 적들이 침략하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신하들이 조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하였고 이에 놀란 위나라 왕은 바둑을 멈추고 신하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상의했다. 그러나 신릉군은 조나라 군대가 공격하는 것이 아니니 바둑을 계속 두자고 했다.

신릉군의 말을 듣고 자리에 다시 앉았으나 좌불안석이던 왕에게 다시 보고가 들어왔다. 조나라 왕이 공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경 근처에서 사냥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위나라 왕은 신릉군에게 어떻게 공격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는지 물었다.  

신릉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자신의 식객 중에는 조나라 왕의 일거수 일투족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 동향을 보고 받고 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은 위나라 왕은 한편으로는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릉군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위나라 왕은 신릉군에 대한 질투와 경계심으로 그의 병권을 빼앗아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진나라는 신릉군을 위협으로 느껴 이간계를 사용하였고 여기에 위왕이 속아 넘어가 결국 신릉군에게 독이 든 술을 먹게 하였다.

신릉군을 독살에 성공하였으나 위나라는 국력이 더욱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예를 갖추고 정성으로 사람을 대하면 천하의 사람들이 달려올 것이나 시기와 질투를 일삼으면 패가망신 할 수 있다는 것을 신릉군 열전에서 읽을 수 있다.

저작권자 © 평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