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요리를 좀 먹을 줄 안다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돼지고기 장조림과 비슷한 동파육(東坡肉)을 한번쯤은 맛보았을 것이다. 중국의 유명한 4대 요리라고 하면 북경요리, 절강요리, 사천요리, 광동요리를 말할 수 있는데 동파육은 상하이와 인접한 절강성 음식이다. 

만드는 방법은 우리의 삼겹살 부위를 크게 잘라서 거기에 간장과 설탕 및 중국의 소스를 넣고 끓여서 나오는데 비계가 있음에도 담백한 맛을 자랑한다. 특히 중국 술인 고량주와 잘 어울리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음식의 이름이 동파육이 된 것은 소동파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름을 딴 음식으로 동파육과 백기육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생존연대도 다르고 또 음식의 유래도 완전히 다르다. 소동파는 북송 시기의 문인이며 관리였다. 원래 이름은 소식이고 사천성 출신인데 그의 호가 동파거사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소동파라고 불렀다. 한국에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은 적벽부로 호북성의 양자강 지류인 적벽에서 유비와 조조, 그리고 주유간에 벌어진 ‘적벽대전’을 평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인간이 스스로 가지지도 못하고 영원하지도 못할 것을 두고 다투고 싸우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설명하고 있다. 

소동파가 항주에서 관직에 있을 때 항주에서 유명한 서호가 범람하여 백성들의 농사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기 위해 사람들을 모집하여 제방을 수리하였다. 이에 감사함을 표하려고 백성들이 설날이 다가오자 소동파에게 술과 돼지고기를 선물로 가져왔다. 

소동파는 다시 돌려주기가 난감하자 일단 고기를 받았고 이를 가지고 요리를 하도록 했다. 원래 미식가이고 술과 돼지고기를 좋아했던 그는 사각형으로 돼지고기를 자른 후 양념을 하여 제방 공사에 수고한 백성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었다. 이후 이 음식은 동파육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한편 백기육(白起肉)은 전국 시기 말에 진나라의 유명한 장군이었던 백기로부터 유래하였다. 진나라가 세력을 확대하던 중에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는 조(趙)나라였다. 진나라의 세력을 막기 위해 소진의 합종책이 있었으나 그가 죽은 후 장의의 연횡책과 범저의 ‘원교근공책’으로 인해 다른 6개 나라의 동맹은 거의 와해된 상태였다. 

이때 진나라와 가까이 있던 한국이란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영토를 진나라에 바쳤는데 그 지역을 관할 하던 관리가 진나라가 아닌 조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로 인해 진나라는 다시 대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였고 조나라는 장수 염파로 하여금 막도록 하였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염파는 수비만 할 뿐 공격을 하지 않고 진나라의 군대를 지치게 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진나라는 염파를 제거하기 위해 ‘반간계(反間計)’를 사용했고, 무능했던 조나라 왕은 염파를 소환하고 새로운 장군인 조괄을 파견했다. 그러나 조괄은 말은 많고 전쟁의 경험이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부임하자 바로 공세적 전략으로 전환하였다. 이때 진나라는 백전백승의 백기를 장군으로 파견하여 조나라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백기는 처음에는 패한 척하면서 조나라의 군대를 깊숙이 끌어들이고 후방의 보급로를 끊어버렸다. 이에 당황한 조나라 군대는 저항하였으나 속수무책이었고 더위와 기아, 질병을 이기지 못하고 투항하였다. 

당시의 관례는 투항하거나 항복한 적들은 죽이지 않는 것이었으나 백기는 조나라의 숨통을 완전히 끊기 위해 40만명의 병력을 모두 생매장해버렸다. 

백기도 훗날 자신의 왕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에도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살인마왕이라고 불렀고 욕하고 원망하였다. 그래서 이 지역에 두부와 마늘을 넣어 불로 익힌 음식이 생겨났는데 바로 ‘백기육’이다. 고기가 아닌 두부이지만 이를 백기의 뇌라고 불렀고 이 음식을 통해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위로했다. 백기육은 지금도 산서성 지역의 특산 두부요리로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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