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 그림이 있다. 어떤 남자가 책상에 얼굴을 파묻은 채 잠을 자고 있다. 잠자고 있는 그의 등 뒤로는 부엉이와 박쥐를 섞어 놓은 것 같은 새 떼가 날아오른다. 바닥엔 고양이 비슷한 동물이 잠든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그림 옆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

18세기 에스파냐(스페인) 궁정 수석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동판화집 <변덕>에 있는 43번째 그림이다. 당시의 미신과 악습에 대한 풍자가 담긴 작품이다. 

그는 왜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고 했을까? 전제군주정치 하에서 궁정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허영과 퇴폐와 정치적 쟁투, 나폴레옹 군대의 에스파냐 침입으로 말미암은 전쟁의 혼란함, 그리고 가톨릭의 마녀사냥에 가까운 잔인한 종교재판에 대한 은유적인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보기에 모든 문명사회는 수많은 결점과 실패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악습과 무지, 그리고 이기심에서 나온 온갖 편견과 기만적 행위에 의한 것이었다.

건강한 이성이 무시되고, 오히려 무지와 미신에 의한 폭력이 자행되기도 했던 시대는 많았다. 사상가 미셀 푸코의 저작 <광기의 역사>에서 보듯이 광기란 시대마다 다른 평가를 받아왔고, 때로 비지성적 행동이 진리의 이름으로 포장되고 그 반대는 광기의 이름으로 정죄당하기도 했다. 

현대화되고 개명(開明)한 세상이라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무지와 미신에 사로잡혀 벌어지는 비극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요즘 대중들에게 충격에 빠트린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나 고발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만 보아도 그렇다. 

잔인한 학교 폭력이나, 이단과 사이비 종교단체들의 실태들을 포함하여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하고 괴이한 사건들이 곳곳에서 벌어진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탄식이 나올 법 하지만, 어디에선가는 그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이성적 사고를 가장한 수많은 악행들이다. 사회 근간을 흔들만한 큰 범죄는 지성인이라 불리는 엘리트들에 의해 자행된다. 치밀한 계산으로 법망을 빠져나가고 불법을 합법으로 만들어버리는 기술에는 무기력감을 느끼게 된다. 

가끔 정치 패널(panel)들의 논쟁을 듣다 보면, 저것이 정말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토론인가 싶을 만큼 난무하는 억지와 선동에 씁쓸해질 때가 있다. 

때로 일탈하는 소수가 아니라 집단 지성의 힘을 믿는다고 한다. 그런데 집단의 이름으로 더욱 폭력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기독교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부어가 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을 고발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쟁과 폭력들, 다수의 힘으로 침묵하게 만들고 희생시키는 소수의 권리들이 있다.  

성경은 이러한 모든 부조리함의 원인을 인간의 죄성에서 찾는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 17:9). 

이것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예수님의 교훈과도 연결된다(마 15:11). 인간의 이성 자체가 죄로 더럽혀져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근본적인 해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에 있다. 

하지만 비록 영적 거듭남이 없는 인간 안에도 조각나고 이지러진 하나님 형상이 남아 있어서 그나마 양심과 이성으로 죄를 제어해 온 것도 사실이다. 만일 그것마저 없었다면 인간은 무법천지로 살았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진정한 구원에 이르지 못하지만, 하지만 어찌하랴. 이지러진 양심과 이성일지라도 그것을 일깨우치는 것이 그나마 사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길인 것을. 사회의 건강성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일에 이성적 사고를 호소하게 되는 이유이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눈을 뜬다. 명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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