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절대자요 전능한 존재로 믿는 정통 기독교 신앙에서는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한데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이 참으로 철저하게 무능한 모습으로 나타난 현장이 있다. 그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한 자리였다. 

놀라운 이적을 수없이 행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무력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렸다. 공개처형의 현장을 지나가던 사람들, 어쩌면 얼마 전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신 현장에 있었음 직한 사람들은 이렇게 비아냥댔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39-40)

한술 더 떠 예수를 증오하고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렇게 조롱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 27:41-43).

심지어 온갖 흉악한 죄를 지어 누구라도 사형받아 마땅하다고 여겼을 강도들조차 이 비난에 동참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 27:44).

전능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무능하였다. 그를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지 못했다. 그를 구원하지 못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또한 자기를 한번 구원해 보라는 조롱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무력한 모습으로 험한 십자가에 달려 있다. 

왜 전능한 하나님은 이 참혹한 십자가의 현장에서 침묵하시는가? 미처 예측하지 못하신 것도,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예수의 험한 십자가가 죄인을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전능한 하나님도 못하시는 게 있다. 둥근 삼각형을 만들 수 없으며,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신실하시다. 그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기 때문이다”(딤후 2:13).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적당히 대충 넘길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을 이루는 방법은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죄인을 대신하여 죄의 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래서 그 고난의 잔을 성자 예수님이 피하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무력하게만 여겨졌던 십자가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승리의 방법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것이 증명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는 일에도 참으로 무력한 방식을 사용하신다. 어떤 놀라운 권능으로 겁주는 방식이 아니라, 잘 타이르고 설득하시는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하나님은 인격을 가진 인간을 로봇처럼 마음대로 조종하시지 않는다.

설득하고 설득해서 마침내 하나님 앞에 설득당하고야 말게 하시는 열심 있는 고집이 있을 뿐이다. 물론 성령님을 통한 내적 부르심이 전제되고 있지만, 우리의 경험으로만 보자면 오랜 기다림 속에서 초대하고 설득하는 무력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마치 집 떠난 탕자를 한없이 기다리는 연약한 아버지의 모습처럼 말이다.

놀라운 신비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어떻게 전능이 무력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초월자가 제한 안에 갇혀 오셨는지. 

전능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포와 두려움이 아닌 한없는 신뢰와 확신으로, 그리고 죄인을 회개시켜 구원하시려고 마치 무능한 하나님처럼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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