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별’과 ‘차별’, 그리고 ‘다름’과 ‘틀림’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차별해서는 안 되지만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다름을 틀린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이 아예 틀린 것일 수도 있다. 

인터넷에 게시된 다음백과에는 ‘차별’을 “둘 이상의 대상에 특정 기준에 따라 우월을 따져 구별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부연하기를, “종교, 장애, 나이, 신분, 학력, 성별, 성적 취향, 인종, 생김새, 국적, 나이, 출신, 사상 등의 이유로 특정한 사람을 우대하거나 배제 또는 불리하게 대우하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평등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한다. 

이 규정을 읽어가다 ‘성적 취향’이란 단어에서 멈칫했다. 차별을 금지해야 한다는 다른 항목들에 대해서는 적극 찬성이다. 그러나 자기 취향을 따라 성 정체성을 마음대로 선택하고 결정하게 하는 ‘성적 취향’이 과연 법으로 보장되어야 할 진정한 자유인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국회에서 법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큰 논란거리이다. 남녀나 국적이나 인종 혹은, 장애나 학력, 신분 등에 의해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은 이미 개별적으로 잘 갖추어져 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더 보완해 가면 된다. 

그런데 ‘포괄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새로운 법을 만들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성적 정체성’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각종 동성애와 성별의 혼동을 합법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수 없게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성을 제 마음대로 바꾸거나,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을 깨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성적 결합도 가족이라고 인정해주어야 하는가? 남자와 여자가 아닌 수십여 가지의 성을 인정해야 하는 걸까? 심지어 우리나라 교육당국은 교과과정을 개정하여 동성애 및 수많은 성적 취향을  옳은 것으로 초·중·고 교과서에 명시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구실로 틀린 것을 다른 것으로 포장하여 말이다.

남녀를 차별하면 안 되지만 구별은 불가피한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아예 성적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자연적 질서를 벗어나는 모든 자유를 허용하라고 압박하는 법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다. 성경은 동성애를 금지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자연스러움을 파괴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남자들과의 자연스러운 성 관계를 여자와 성 관계를 갖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와 똑같이 남자들도 여자들과 행하는 자연스러운 성 관계를 버리고 남자들끼리 정욕에 불타, 남자가 남자와 부끄러운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그 잘못에 합당한 벌을 받았습니다.”(로마서 1:26-27). 

우리가 자연을 무분별하게 남용하고 파괴한 결과를 지금 지구적 환경 대재앙을 통해 경험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의 자연스러움과 질서의 경계가 무너진다면 이에 못지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다움’라는 말에는 자연스러움과 책임감이 잘 버무려져 있다. 어떤 분야든 그것 그대로의 본성에 걸맞은 모습으로 나타날 때 ‘다움’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다움’이 ‘다움’으로 남을 때 사회는 더 건강해진다.  ‘성 소수자’로 불리는 사람들을 혐오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많은 사랑과 관심과 인내와 회복과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다만 ‘다움’을 파괴하고 질서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동성애를 ‘다름’이 아닌 ‘틀림’으로 읽는다. 그것은 그들을 차별하자는 말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구별을 파괴하거나 혼동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 자연스러움의 아름다움을 지키려고 외롭게 싸워가고 있다.

이 문제는 편협함이나 차별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공동체의 건강과 관련된 것이며, 성경 진리의 문제이다. 모든 것은 자연스러울 때 아름답다. 자연이든 그 안에 있는 사람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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