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살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필자는 중고등학교 시절 족보가 꼬여(?) 난감했던 기억이 있다. 교회 중고등부에는 질병 때문이었는지 한해 늦게 학교에 다닌 아이도 있었다. 학년으로는 나보다 2년 아래였지만 실상 동갑내기였다. 형이라 부르며 나에게 깍듯하게 존대했다. 바로 아래 학년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실제 몇 살인지는 알리지 않았다. 형님 대우가 즐거워서가 아니라 밝혀서 서로 어색할 수밖에 없는 당시 문화가 그렇게 만들었다. 

나이가 계급인 시절이 있었다. 오죽하면 “민증 까봐”라는 말이 등장했을까? 논쟁을 하다 밀리는 것 같으면 했던 말, “너 몇 살이야?”도 같은 맥락이다. 아직도 나이로 ‘갑질’하려는 잔재가 남아있다. 

대학에서 한 학년 선배랍시고 윽박지르던 사람 기억보다, 선배이니까 더 살갑게 대해주고 뭣 하나라도 더 도우려 했던 이의 기억이 생생하다. 과거 군대에서 유행했던 말이 있었다. “하늘같은 고참.” 분명 상급자와 하급자의 구분이 당연하겠지만, 그가 하늘같을 수는 없다. 

우리는 사회에서의 지위고하, 상하관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이가 권력이 되고, 직급이 건강한 토론을 막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불가피하게 지시를 하고, 지시를 받아야 하는 상하간의 구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격까지 위아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옛날 주인과 종과의 관계는 어떠할까?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을 것이다. 군대와 더불어 상하복종의 가장 전형적인 관계가 아닌가? 단순한 일의 지시가 아니라, 억울하고 부당하고 인격적인 모욕을 당해도 종은 그저 참을 수밖에는 없었다. 

지금이야 우리 사회에서 그런 주인과 종만큼의 상하관계는 없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짓밟는 행위는 여전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말 그대로 ‘갑질’이 아닌가? 억울하면 출세해야 하는 이유가 내가 그 자리에 올라 갑질하지 않겠다는 마음보다 그 갑질이 부러워서는 아닐는지 돌아보게 한다. 

노예제도가 보편적이었던 시대에 성경은 이렇게 분명한 상하관계, 갑과 을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우선 을의 입장에 있는 자들에 대한 교훈이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5-7). 윗사람의 권위를 존중하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 자세이다.  

그리고 상전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 6:9). 

더 나아가 재산을 훔쳐 도망갔던 노예가 예수를 믿은 후 회개하고 주인에게 돌아왔을 때 사도 바울은 그의 주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몬 1:16). 

나이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나이 이야기로 끝을 맺어야겠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화를 내며 말하지 말고, 아버지를 대하듯이 하십시오. 나이 어린 사람을 대할 때는 형제에게 하는 것처럼 하십시오.”(딤전 5:1).

내가 가진 연륜과 경험이 있다면, 내가 가진 힘이 있다면 남을 무시하거나 군림하려들기 보다 남을 더 섬기려는 넉넉한 마음이 귀하다. 누군가 나의 갑질이 아닌, 나의 겸손한 친절로 유익을 얻은 이가 어느 곳에선가 나를 고맙게 기억에서 떠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이 그 미래의 기억을 남기기에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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