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은 한국전쟁 이후 서로를 중공과 남조선으로 부르면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은 항상 북한 편을 들었고 한국을 미국의 전진기지 정도로만 취급하였다. 

  그러나 한국이 70년대와 80년대에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하였고 아시아의 4마리 용의 하나로 발전하면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한국 역시 북한의 상시적인 위협에 직면하면서 북한을 움직일 수 있는 지렛대로 중국과 당시 소련의 입장 변화가 필요하였다. 

  한국과 중국 관계는 한국과 중국 내부의 변화와 국제정세의 변화로 관계개선의 실마리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은 1978년 등소평이 정권을 잡은 후 개혁과 개방 정책을 실시하여 국제무대에 조금씩 진입하기 시작했다. 홍콩과 마주한 심천과 주해, 산두, 하문 등의 4개 도시를 경제특구로 설정하였고 외부의 자금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중국의 입장에서 매력적인 국가로 보였다. 지리적으로 인접한 한국과의 경제협력은 등소평의 입맛에 딱 맞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국제적 환경은 여전히 냉전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 대립의 상태에서 한국과 어떤 접촉도 하기 어려웠다. 

  한국의 입장에서 고도의 산업화와 임금 상승 압력은 경제발전에 있어서 새로운 생산기지와 시장이 필요했으며 중국은 상당히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요인 이외에도 북한과 중국 그리고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한반도의 안정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중국에서 비행기를 가지고 탈출한 조종사가 한국에 착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문제를 처리하면서 한국은 양면 전략을 펼쳤다. 즉 조종사가 적대국인 중국에서 탈출했지만 조종사는 타이완으로 보내고 비행기는 다시 중국에 돌려 보내 중국과 타이완 양쪽에 대해 중립적 태도를 취한 것이다.    

  여기에 80년대말 한국의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선언하게 된다. 북한을 포함한 중국,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있음을 밝혔다. 북방정책은 한국의 외교정책이 전향적으로 변화되었음을 공식화 하였다. 

  이에 화답을 하듯 중국은 아시안게임과 서울 올림픽에 대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하였고 중국에 한국무역대표부 설치를 허용하였다. 비록 직접적인 무역 거래는 아니었지만 홍콩을 거치는 삼각무역 형태로 한국과의 무역을 시작한 것이다. 

  등소평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 “양국 관계가 문은 닫혀있지만 잠겨있지는 않다”라는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적당한 시기가 오면 양국의 관계가 개선될 것을 넌지시 표현했다. 이후 1989년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고 소련이 해체되는 급격한 국제정세의 변화가 초래되었다. 

  드디어 1991년 한국과 북한은 유엔에 남북한 동시가입을 하였고 한국과 러시아가 국교정상화를 이루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한국과 러시아의 국교정상화는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했다. 중국은 이제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로 한국과 비밀리에 국교정상화 담판을 시작했다. 

  서울과 북경을 오가면서 양측은 서로 북한문제와 타이완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고 한국은 중국이 한국과 북한 모두와 외교관계를 맺게 된다면 타이완과의 외교도 계속 유지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한국은 중국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중화인민공화국만을 인정하고 타이완과는 비관방의 교류는 가능하다는 선에서 서로 절충이 되었다. 

  외교적인 차원에서 비대칭적 결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국과 중국은 국교정상화를 하였으며, 한국은 한반도의 안정에 대한 플러스 요인과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으로 대신했다. 한국과 중국이 국교수립을 한 직후 양국간의 경제적 협력은 날개를 단 것처럼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국과 중국의 국교수립이후 지난 30년동안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오고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 양국 정부와 국민들간에는 조금씩 불신이 쌓여가고 있으며 서로의 비호감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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