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과 환난은 아프다. 누구도 역경을 환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거센 시련 속에서 사람이 더 단단해지고 성숙해진다. 성경은 말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일반 사회에서 말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 이야기이긴 하다. 그러나 일반의 상식으로 보아도 타당한 말이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 나무 농장에 대한 뉴스 기사를 보았다. 

한국인이 해외에 1998년부터 조성한 나무농장인데, 서울의 넓이 정도에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양묘장에서 묘목을 생산하여 2개월 정도 자라게 하다가, 그 뿌리내린 묘목을 가지고 가서 농장에 심는다.

 그런데 그곳을 방문한 기자가 묘목을 보니 노랗고 붉은 색깔을 띠는 것이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양묘 담당 과장의 대답은 이러했다. 이것이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도록 출하 전에 물도 적게 주는 등 악조건에 적응하도록 훈련하는 것의 결과라고 말이다. 파릇파릇한 묘목은 오히려 좋은 게 아니라고 부연해서 설명했다. 비록 당장은 보잘것없어 보여도 오히려 길게 보면 악조건을 이기고 튼실한 나무로 자라나기 위한 준비였던 셈이다.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 시련을 이겨내는 강한 묘목으로 세워주는 것이다.

가을이 되면 논바닥에 누워버린 벼들을 보곤 한다. 심한 폭우가 아닌데도 누워버린 경우도 있다. 많은 수확을 위해 종자개량을 하면서 벼 줄기는 힘이 없고 알곡만 많이 달려서, 조금 온 비에도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넘어져 버리는 것이다. 이전 세대에 비해 고등교육은 많이 받았지만 시련에 대처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지금의 세대를 연상시킨다. 

지난 세대는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우울감이란 사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예전에 비해 먹고 살기 너무 좋아진 지금, 공황장애니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작은 일에도 쉽게 좌절한다. 거센 환경에 자주 부닥쳐보지 않았기에 조금의 어려움에도 쉽게 무너지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개인차들이 있으며, 시련에 대처하는 자세는 단지 개인의 성품의 문제로만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예전보다 풍부함의 시대를 살았기에 비교적 어려움 없는 환경에서 자란 결과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성숙을 이루고자 없는 시련을 일부러 만들 필요도 없다. 하지만 시대가 아무리 바뀐다 해도 크고 작은 시련은 늘 우리에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지금이 살면서 제일 힘들다고 느끼는 이는 없는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언제고 우리 인생이 힘들지 않은 적은 없었다. 버티는 것도 실력이라고 했던가. 시련을 견뎌내며 우리의 맷집을 키워야 한다. 환난에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하며 인격이 가다듬어지고, 그 성숙한 인격으로 인생을 좀 더 넉넉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절망하기보다 희망을 품는 삶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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