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고 나와 보니 소사벌이 나의 정원 나의 밭이다. 삼남길이라는 작은 이정표를 따라 가을 냄새 가득한 단풍길을 걷기란 모처럼만에 갖는 부유이다. 

나는 한가한 산책자가 아니다. 오히려 생활의 고단함과 병에 짓눌린 곳에서 떨어져 나와 숨쉬기를 선택한 나만의 시간인 것을! 생활력을 앞세운 돈 냄새보다 늦가을 나뭇잎 냄새가 나를 끄는 것은 무엇일까.  움직임 없는 생각은 질려 넘어지고 걷기와 시간의 풍경보기를 언제부터 즐기게 되었다.

소사동으로 들어가는 작은 오솔길 옆으로는 추수를 끝낸 들깨 묶음들이 어수선하고 야트막한 야산은 변하여 조금씩 파헤져졌다. 단칸방에 신혼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 곳도 이 마을이다. 그 후로 스무해의 가을이 지났고 몇 번의 이사를 하였지만 소사벌 길은 가까운 나의 산책로이다. 대동법 시행 기념비의 돌틈에 이끼는 여전히 푸르고 늦게 막 피어오른 주홍빛 백일홍이 소사천까지 피어있다. 물고기가 노니는 소사천은 드넓게 펼쳐진 논에 봄부터 물을 대어주다가 지금은 휴식처럼 조금씩 흐르고 있다.

붉음과 갈빛을 뿜는 가로수 사이를 걷고 걷는다. 한 벗나무는 빠르게 잎을 모두 내려놓았고 한 플라타너스나무는 바람속에서도 잎을 모아 안타까이 데리고 있다. 

내년 봄을 기다리는 해당화 한 포기, 가지에 매달린 채 서리를 맞을 방울토마토 몇 알과 고추열매가 보인다.  작은 배추밭에는 줄지어 심긴 배추들이 속이 꽉 차서 중심을 잡을 준비를 마치고 있는 듯하다.  새로이 생긴 마을문고 ‘소새꿈터’ 둘레에는 연보라 들국화가 무더기로 피어있다. 

지금 걷는 동안에도 휴대폰 편지함으로 부고가 날아든다. ‘모친상, 발인 11월 4일, 장소 중앙장례식장,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고와 낙엽은 한 소식통으로 바람에 흩날리는구나. 아픈 사람들, 다 늙어버려 쇠잔한 사람들. 그 바스락거림이 생명의 불씨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의 자양분으로 입고 덮으며 말없는 말로 전하는 우리들의 나무 아래서 나는 자유를 느낀다. 봄부터 햇빛과 비를 명랑하게 따라가다 침묵으로 뿌리로 돌아가는 것들에 인사를 한다. 

어느 시인은 “사랑은 산책하듯 스미는 자 / 산책으로 젖는 자” 라고 표현하였다.

가을 끄트머리에 매달린 자줏빛 대추 몇 알을 따서 먹으며 읊조린다. 

나무야 들꽃들아! 나도 너의 길을 따라 기탄없이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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