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진 마음은 부담감이다. 그리고 죄송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에 깊게 연결되어 있다. 빚진 마음의 배후에는 사람이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누군가의 배려와 도움으로 오늘의 내가 있음이다. 부모에게 빚진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부모가 자신에게 베풀어준 사랑과 헌신에 마땅히 보답하려는 마음이다. 사회에 빚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 공동체의 따뜻한 배려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에 대한 묵직한 책임감을 가질 것이다. 

자식에 대한 빚진 마음은 좀 독특하다. 받기는커녕 베풀어주면서도 더 주지 못함에 대한 부담을 안고 살아간다. 태어나게 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어서일까? 그 무엇보다 사랑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이 커지는 만큼 부채의식도 커지는 것이다. 

사랑 없는 빚진 마음은 무거운 부담감에 억눌리지만, 사랑을 품은 부채의식은 은혜를 갚기 위해 기꺼이 더 많이 행동하게 한다. 별 다르지 않은 사랑을 받았어도 이에 대한 빚진 마음은 제각각이다. 부모가 나에게 해준 게 뭐냐고 항변하는 자식이 있는 반면, 그보다 못한 어려운 형편에서 변변한 도움을 받지 못했음에도 한없이 큰 부채의식과 감사의식을 갖는 경우도 있다. 나는 지금 누구에게 무엇에 대한 빚진 마음이 있는가? 그 마음으로 실제 하는 행동은 무엇인지 한번 쯤 곱씹어 볼 일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한 빚진 마음이 있었다.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사실 바울은 결코 기독교 복음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면서, 자신은 그리스도를 욕하고 핍박하며 온갖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괴롭혔던 사람이라고 밝혔다(딤전 1:13). 

그는 뼈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고 식민지 주민임에도 불구하고 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다(빌 3:5-6, 행 22:28). 그야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그는 당대에 최고 석학으로 불렸던 가멜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은 전도양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잘난 머리로 그가 했던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한 일이었다. 그러던 바울이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인생의 일대 전환을 이루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너무 잘 알기에 그는 평생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자신처럼 복음을 반대하고 훼방했던 사람조차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경험했기에,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에 대한 빚진 마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상대방에게 준 피해 때문에 갖는 부채의식이든,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나오는 부채의식이든 그저 갖고 있는 것으론 부족하다. 빚진 마음은 조금이라도 갚아나가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누구에게 빚졌는가? 어떤 빚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이제는 작은 행동이라도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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