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의 이상주의적인 실험이었던 대약진이 비극적으로 끝나자 유소기와 등소평이 중국의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전면에 등장했다, 원래 유소기는 모택동 다음의 자리에 있었는데 1959년 4월 국가주석이 되었고 공산당내 정치국의 제 1선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역할을 한 것이 등소평이었다. 

모택동은 2선으로 물러나 있었는데 점차 유소기의 세력이 확대되고 있었다. 유소기를 중심으로 등소평, 그리고 당시 북경 시장이었던 팽진(彭眞)도 이들에 합세하고 있었다. 이렇게 유소기의 존재감이 부각되고 조정정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모택동은 심리적으로 불안감과 질투심을 느끼게 되었다. 

모택동은 자신이 중심이 되어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켰고 나라를 세웠으므로 중국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지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혁명이나 어려움을 겪고 성공한 인물들이 잘못된 길로 빠지면 잘된 것은 자신의 탓이고 잘못된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린다. 특히 모든 것이 자신의 한마디면 그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택동은 권력의 독약을 마신 것이다. 

모택동은 유소기와 등소평 등이 권력을 잡고 정책을 펼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비록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었다. 유소기의 실용주의 정책이 순수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유소기는 파탄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농민들에게 생산청부제라고 하는 것을 실시했다. 이 정책은 땅은 비록 국가의 소유이지만 생산량의 일정 부분을 농민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 모택동은 중국은 공산주의 사회로 완전히 진입하기 이전에는 계급투쟁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유소기와 그의 정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유소기를 제거하기 위해 군중노선을 동원하고 혁명과 계급투쟁을 주장하면서 국민들을 갈라치기 시작했다. 모택동이 주장한 혁명과 계급투쟁은 중국을 극단적인 분열 상태로 몰아갔다. 모든 권력에는 여기에 기생하는 세력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모택동의 이러한 극단적 사고에 힘을 싣고 그 앞잡이를 하는 인물들이 등장했다. 

중국 공산당 회의에서 모택동은 ‘중앙문화혁명소조’라는 것을 통과시켰는데 이들은 노선투쟁의 이름으로 유소기 등 실용주의자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모택동의 권력을 되찾기 위한 세력으로 모택동의 부인인 강청을 비롯하여 진백달, 강생, 요문원이 있었다. 이후 이들은 ‘4인방’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유소기에 대한 공격의 전초전으로 요문원은 상하이에서 팽진을 비판하는 논문을 게재하고 자본주의를 숭상하는 배신자라고 낙인찍었다. 또한 진백달은 북경대학에서 학생들을 선동하여 당시 북경대학의 총장을 몰아냈다. 

이들의 악행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심지어는 초등학생까지도 계급투쟁과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 학생들은 젊은 혈기와 혁명의 주체자가 되었다는 생각으로 곳곳에서 파괴를 일삼기 시작했다. 

이들은 목에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행동을 했기 때문에 ‘홍위병’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군중노선에 현혹된 이들은 자신들의 선생님과 심지어는 자신들의 부모도 자본주의자라고 비판하면서 고발을 하여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무자비한 숙청의 피바람이 중국을 10년 동안 휩쓸게 되었다. 

모택동의 개인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중국은 또 한번 격동의 시기를 맞게 되었고 그 기간을 문화대혁명이라고 한다.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중국의 많은 전통과 미풍양속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중국의 관광지나 유적지에서 머리가 없는 불상이나 지워진 비석들을 보게 되는데 대부분이 문화대혁명 시기에 파괴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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