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룻기 3장에는 배려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보아스의 인품이 잘 묘사되어 있다. 지역 유지였던 보아스에게 대가 끊겨 멸문지화를 당한 집안의 젊은 과부 룻이 한 밤중에 찾아온다. 룻은 보아스에게 구약의 율법에 근거하여 ‘기업무를자’의 책임을 이행해 달라고 요청한다(룻 3:9). 기업무를자는 ‘친척지간에 대신 책임져주는 사람’이다. 마치 연대보증을 선 것처럼 나대신 그 책임을 대신 감당해 주는 사람이다. 친족이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질 때 거기서 구해 내는 것이 기업무를자의 책임이다. 

젊은 과부인 룻의 시댁의 경우 다른 집안에 토지를 팔아버렸었는데 그 토지를 되사주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대가 끊겨 상속자조차 남지 않았으므로, 당시 관습을 따라 룻과 결혼하여 후손을 보고, 그 후손이 죽은 자의 기업을 이어 받게 해야 할 상황이었다. 보아스는 이 요청을 기꺼이 수락한다(룻 3:11). 보아스는 토지를 되사주어 자기 명의가 아니라 죽은 친척 엘리멜렉 가문의 명의로 넘어가게 되며, 더구나 룻과 결혼하여 부양해야 할 책임을 스스로 떠맡은 것이다. 

보아스는 이런 모든 일들을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더구나 자기보다 선순위에 있는 친족의 의견까지 물어서 합법적으로 신중하게 처리하여 하였다. 또 룻에 대한 나쁜 소문이라도 날까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잘 관리한다(룻 3:12-13). 이 모든 과정에서 공동체의 보존을 소중히 생각하고, 룻의 입장에서 배려하려는 보아스의 자세가 잘 드러난다.   

요즘 대통령 후보로 나선 이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상대방을 비난하고 깎아내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양새다. 온갖 비방과 험한 말들을 쏟아놓는다. 그러면서도 모두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한다. 그것을 보는 국민들은 답답하기만 하다. 자기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 더 정제된 말과 행동, 상대를 배려할 수 있는 인격을 겸비한 사람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 것일까? 

일반 사회에서도 점점 배려와 친절, 자기희생이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된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옛 속담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산을 지키려 하지 않는 시대 같다. 누군가의 배경으로 남으려 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유익이나 가족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는 것은 옛날의 미덕이다. 다 주인공이 되려하고, 나의 행복과 성공이 모든 것의 일 순위가 되었다. 

‘갑과을’, ‘양성평등’, ‘공정사회’가 화두가 된 시대다.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하고 어떠한 불이익도 참아내지 않는다. 이전 시대의 불합리와 불이익에 대한 반작용일 수도 있겠다. 공정한 대우와 기회를 박탈하거나 차별하는 일은 분명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너무 경직되고 민감하고 날카로운 사회가 아니라, 좀 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포용적이고 넉넉한 배려가 있는 사회를 마음에 그려본다.

저작권자 © 평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