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룻 3:9). 젊어서 일찍 남편을 여읜 이방 여인 룻이 보아스에게 한 프러포즈다. 보아스는 그 지역의 재력가이기는 했지만 룻에게는 아버지뻘 되는 나이 많은 사람이었다. 늙은 재력가와 재혼하여 팔자라도 고쳐보려는 심산일까? 

보아스의 반응을 보면 그런 의도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룻 3:10-11). 보아스는 룻이 홀로 된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먼 타국으로까지 따라와서 극진하게 봉양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룻의 청혼은 이보다 더 큰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 칭찬한다. 왜 일까?

구약 율법은 토지를 함부로 팔지 못하게 했고, 형편상 팔았더라도 곧 되사서 가문에게 할당된 기업을 보존하여 후대에 전수하도록 했다. 만일 팔아버린 토지를 가난하여 되살 수 없을 때 친족이 그 기업을 대신 되사주어야 했다. 이런 책임을 가진 친족을 ‘기업 무를 자’ 혹은 ‘고엘’이라 부른다. 그런데 기업을 상속받을 자가 없는 경우에는 남편을 잃은 부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그 가문의 대를 이어주는 ‘형사취수’(兄死娶嫂)의 책임까지 이행해 주어야 했다. 이것은 사회보장제도가 따로 없었던 고대 근동에서 공동체가 서로 책임을 져주도록 하나님께서 배려해 주신 제도다. 룻의 프러포즈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된 집안을 살리려는 충정이었다. 

룻이 보아스의 ‘옷자락’을 언급한 것은 매우 독특하고 의미심장하다. 보아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룻을 축복했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 마치 어미 새의 날개 품에 보호받는 새끼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한 룻에게 풍부한 상이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날개’와 보아스의 ‘옷자락’은 ‘카나프’(kanaph)라는 동일한 단어이다. 

룻은 보아스가 축복했던 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카나프) 아래서 받는 풍성한 은혜를 보아스의 ‘옷자락’(카나프)을 통해 받기를 원한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수천마디의 좋은 말로 누군가를 축복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축복의 말이 이루어지는 통로로서 정작 내가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날개’와 ‘보아스의 옷자락’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하나님은 사람과 사건을 통해 섭리하신다. 우리 주변 사람들, 그리고 내가 만나는 사건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가는 소중한 단서다. 나는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날개의 통로로서 옷자락을 펼칠 수 있다. 또 누군가가 나에게 그런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오늘 나의 ‘옷자락’이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를 경험하는 통로로 사용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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