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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국인의 지혜 451다시보는 중국 역사 (103) 스탈린의 사망과 대약진운동의 시작
박기철 평택대학교 중국학과  |  pa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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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7.28  11:2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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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함으로써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서방세계와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고 그 관계는 미중소의 전략관계가 변화되는 1972년까지 지속되었다. 

외교적으로 고립된 중국은 소련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킬 수 밖에 없었고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정권을 유지하면서 중국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다. 스탈린의 입장에서도 미국과의 대립에서 모택동의 중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중국의 경제적 재기를 위한 자본과 기술을 제공했고 중국은 이를 바탕으로 제1차 경제개발계획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스탈린은 원래 소련 출신이 아닌 조지아 출신이었으나 훗날 공산주의자가 되어 레닌의 뒤를 잇는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된 인물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소련을 승전국으로 이끌었고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대등한 관계로까지 발전시켰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북한을 해방시킨다는 이름으로 북한을 점령한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교한 후 김일성에게 북한의 권력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1949년 3월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가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아직 준비가 안됐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48회에 걸쳐 남침을 집요하게 요구했고 결국 허락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스탈린이 권력을 잡는 과정을 보면 철저하게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했다. 또한 혁명 동지들도 반혁명의 혐의를 씌워 숙청하였다. 독재가 심해지면서 스탈린에게는 ‘위대한 지도자’라는 별칭이 붙었다. 

위대한 지도자라는 단어는 중국의 모택동에게도 그리고 북한 세습 왕조의 지도자에게도 모두 사용되고 있다. 아마 이 단어는 역설적이게도 독재자들이 항상 애용하는 단어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독재의 정점을 유지하던 스탈린도 결국 죽음의 문턱을 넘지는 못하고 1953년에 사망하였다. 그가 죽은 후 새롭게 권력을 잡은 후르시쵸프는 1956년에 열린 소련 제 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의 죄상을 고발하는 장시간의 연설을 했으며 스탈린을 격하하기 시작했다. 정권이 바뀌면서 그의 시체는 크레믈린 궁으로 이장되었고 그에게는 ‘인간 백정’이란 명칭이 붙여졌다. 또한 소련 연방 내에 있던 스탈린의 동상과 그와 관련된 조형물들이 모두 제거 되었다. 

스탈린에 대한 우상숭배가 사라지고 그를 격하하기 시작하자 중국의 모택동은 이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동시에 후르시쵸프가 제안한 적대적인 미국과 서방세계와 전쟁이 아닌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모택동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모택동은 미국이나 서방과의 공존은 불가능하고 공산주의 혁명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소련의 지도자간의 불신은 쌓여갔고 결국은 폭발하고 말았다. 모택동은 후르시쵸프를 수정주의자라고 비판하였고, 후르시쵸프는 모택동을 교조주의자와 독재자로 몰아갔다. 이 두 지도자의 관계 악화는 바로 두 나라간의 관계 단절로 이어졌다. 소련은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끊어 버렸다. 경제적인 자금, 기술 그리고 기술자들의 철수로 이어졌다. 소련의 중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지원의 단절은 중국의 경제적 회복에 막대한 영향을 주기 시작했고 모택동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바로 ‘자력갱생(自力更生)’을 바탕으로 하는 대약진(大躍進)운동을 계획했다. 

미국과 중국, 소련의 삼각관계에서 두 강대국을 적으로 삼은 이상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게 된 중국은 자신들만의 힘으로 경제적 발전과 성과를 이루어 내야 했다. 모택동은 다시금 중국 인민들에게 혁명 정신을 고취하기 시작했다. 

1958년에 시작된 이 대약진 운동은 모택동의 이상주의가 얼마나 국민들을 힘들게 하는가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는 국내 혁명시기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혁명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었으며 그 정신을 바탕으로 다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중국 국민들에게는 비극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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