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7월 소련 다음으로 중국에 공산당이 만들어졌다. 이 당시에 중국은 지식인들이 1차세계 대전 이후 서방 세계에 대해 실망을 하였고 그 대안으로 받아들인 것이 공산당이었다. 현재 중국에서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이하여 공산당과 모택동 사상을 고취시키는 것에 열을 올리고 있다. 

중국의 언론매체들은 최근 공산당을 중심으로 중국이 하나가 되어야 하고, 공산당에 반대하는 것은 마치 국가의 반역자인 것처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공산당이 없었다면 새로운 중국도 없다(沒有共産黨, 沒有新中國)”라는 구호가 중국 전역을 휩쓸고 있다. 

이 중국 공산당이 중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중 하나는 모택동의 전략과 전술이 공산주의 혁명에서 성공적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당시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을 비교해보면 객관적 실력으로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모택동의 공산당이 승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 공산당의 창립 당시 모택동이 호남성 대표로 참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처음부터 공산당을 이끌었던 것은 아니었다. 초기 중국 공산당을 이끌었던 인물들은 주로 소련의 지원을 받았거나 혹은 유학파들로 구성되었다. 한편 모택동은 서방에 유학을 했거나 소련의 적극적 후원을 받는 인물이 아니라 중국에서 성장하고 공산주의의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고 중국 공산당을 이끌었을까? 모택동은 매우 독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가 마르크스를 서구식으로 이해하고 학습했다면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는 바로 중국에서 중국식 혁명법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주로 태평천국의 난이나 농민들의 반란에 대해 학습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혁명에 응용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주류 공산주의자들은 교조적인 공산주의 사상에 맞추어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혁명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반면 모택동은 당시 중국 상황을 중국적 시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농민이었기 때문에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주체 세력을 농민으로 삼았다. 역사적 경험에서 농민들은 자신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토지였고 적대적인 대상이 지주들이었다. 이 농민들에게 공산주의가 어떻고 자본주의가 어떻고 하는 것은 이해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모택동이 세력을 키워 지주의 땅을 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눠주자 농민들은 모택동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힘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마치 태평천국의 난에서 홍수전이 지주들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분배해준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모택동 또한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가 그리 높았던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장개석의 국민당이 대지주와 대자본가를 중심으로 하나의 세력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는 농민을 통해서 혁명을 실천해야 한다는 정도였다. 

모택동은 농민을 자신의 주력군으로 삼은 이후 중국의 손자병법이나 36계 등 다양한 중국의 병법을 기초로 혁명을 시도했다. 그의 대표적인 전술이 16자 전술로 유격전의 중심을 이루었다. 매우 단순하지만 지극히 유용한 방식이었다. 자신보다 강한 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그의 유격전에서 사용된 16자 전술은 “적이 공격해오면 도망가고, 적이 주둔하면 괴롭히고, 적이 피곤하면 공격하고, 적이 도망가면 추격한다(敵進我退,敵駐我扰,敵疲我打,敵退我追: 적진아퇴, 적주아우, 적피아타, 적퇴아추)”이었다. 그는 산악을 이용하여 이 전술을 구사하였고 수십만명의 국민당 군대가 공산당을 소멸시키지 못했다. 

모택동의 전략과 전술은 중국의 역사에서 방법을 찾았고 거기서 혁명의 핵심을 노동자가 아닌 농민임을 간파했다. 동시에 그의 유격전이 결국 오늘 100년의 중국 공산당을 만든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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