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한번 들어본 적 없는 주부가 어느 하루 그림을 그렸다’는 기사를 보내왔다. 크레파스 작가 원은희 작가 얘기다. 10년 경력이 된 그녀의 그림을 보고 ‘행복하다’는 내용에 지금의 내 모습이 떠올랐나보다. 

‘행복’은 인간이 그리는 염원이자 정서를 공유하는 소통창구다. 몇 해 전부터 틈틈이 습작해 올린 그림에 그저 그런 반응이었으나 홀로, 그림이란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에 나날이 달라지는 습작 실력과 더불어 미술 특강을 받는 열정까지 보이니 먹고 사는 일이 다반사인 이 시국, 이 나이에 진정 용기 있고 신바람 나는 일 아니겠는가. 

칠월에 있을 <체인지 아트> 제4회 전시회는 시인을 벗어나 화가로서의 꼽사리 끼는 나의 첫 데뷔 무대라 할 수 있다. 장르가 극명한 화가들의 예술 모임 전시를 위해 그림이란 영토를 확장했다. 

미술은 예술의 한 분야이다. 문학과 예술은 분리가 아니라 충돌이자 화합이고 분리이자 온유의 그윽함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처럼 조금씩 다가 가다보니 실력보다 작가가 드리운 내면의 조각, 충돌과 빛이 이끄는 따스하고 차가워지는 느낌의 컴퍼스와 물리게 된다.

생을 태운다는 건 무엇일까. 누구나 태운 기억을 추억이란 이름으로 소환한다. 추억이 없는 들짐승은 하이에나처럼 먹이를 찾아 울음의 신호만 보낸다. 미안한 일이지만 하이에나는 라이온 킹이란 영화에서 나쁘게만 본 짐승이다. 

‘무엇을 하는 일’은 투쟁이다. 그냥 투쟁이 아닌 ‘아름다움’이란 말로 감싼 행위가 주는 정신의 보상이자 보물이고 그윽한 눈물이다. 

처음 대하는 아크릴 물감, 모델링 페이스트, 나이프로 칠하는 감각을 익히는 그림과 나와 누리는 이식의 시간, 나보다 한참 어린 동료가 “시작이 반이다”라는 경쾌하고 건방지지만 훌륭한 말을 했다. 시작이 반은 꼰대의 나이를 가진 우리 시대가 가진 관념어인 수학의 정석과 같은 말인데, 그래서 새롭게 들렸다. 

나무를 불에 구워 낸 검은 덩어리, 모든 집착의 시간을 열면 열망에 가득 찬 그림 한 점 가득하다. 

환한 웃음의 시전이 도전과 용기로 그리고 태운 ‘숯’처럼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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