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의 기억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중국의 심양에 있는 자매대학을 방문하였고 그 일정중에 단동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심양에서 동쪽으로 한참을 가다 만난 압록강을 가운데 두고 중국쪽에는 단동이 있고 북한쪽에는 신의주가 있다. 

단동과 신의주 사이의 압록강에서 두 개의 다리를 만나게 된다. 하나는 단교(斷橋)라고 해서 끊어진 다리가 딱 압록강의 중간까지 이어져 있다. 또 하나는 많은 트럭들이 북한으로 물자를 실어나르기 위해 줄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다리는 기차와 차가 같이 다닐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으며 위에는 ‘중조우의교’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그리고 단동의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항미원조 기념관’이 언덕위에 있어 시간을 내어 가보았다. 그곳에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중국측 시각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한글로 된 서신이 한 장 있었다. 그 서신에는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군대를 빨리 파견하여 지원해달라는 내용과 김일성의 서명이 보였다. 

그 서신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김일성은 모택동이 약속한대로 미군이 참전하면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라는 내용으로 중공군의 지원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 편지의 내용대로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시작했고 남북한의 통일은 요원해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전쟁의 개시와 함께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이승만의 한국 군대를 몰아붙였고 한반도 전체가 붉게 물드는 순간이었다. 이에 놀란 미국은 6월 27일 바로 참전을 시작했고 동시에 유엔을 통해 한국전쟁에 유엔군을 보낼 것을 요청했다. 당시 안전보장이사회의 이사국이었던 소련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유엔은 84호 결의를 통해 북한의 불법적 남침으로 규정하고 유엔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계속 밀리던 한국군은 유엔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바꾸기 시작했다. 소련은 중국에게 계속 참전을 종용했고 중국도 당시 인민해방군의 참모총장이었던 섭영진과 총리 주은래의 이름으로 38선을 넘을 경우 중공군이 참전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10월 1일 한국의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김일성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고 당시 중국의 지도부 중 일부는 미국과의 전쟁을 회피하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이때 스탈린의 비밀 전보가 도착하여 중공군의 참전을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주은래도 중국 밖에서의 전쟁이 유리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0월 8일 모택동은 또 한번의 모험을 걸기로 한다. 바로 ‘중국인민지원군’이란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문건에 서명을 하였다. 모택동의 중공군은 ‘항미원조’, 즉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지원한다는 이름으로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10월 19일 미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했고 중국과 북한의 변경지역인 압록강까지 진출하였다. 바로 그날 밤 대규모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미군과 연합군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중공군의 사령관은 팽덕회로 26명의 병력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중공군을 얕잡아 보았던 미군과 유엔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고 이후 12월 6일에는 중공군은 평양을 다시 점령했다. 중공군은 우회와 매복 등의 중국에서 국민당과의 전투 경험을 그대로 적용했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재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유엔군과 38선을 중심으로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휴전을 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중공군은 일부가 북한에 주둔하다가 1958년 10월에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모택동의 입장에서 한국전쟁 참전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전쟁이었다. 그가 아꼈던 아들이 참전했다가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을 했으며, 대만을 공격하여 중국의 완전한 통일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더욱이 중공군은 약 60만 명이 사망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또한 미국과 중국이 전략적으로 제휴를 하는 1972년까지 미국의 봉쇄정책으로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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