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0월 1일 중국에 붉은 정부가 수립되자 미국의 정계와 학계에서는 한탄이 터져나왔다. “우리는 중국을 잃어 버렸다(We lost China)”란 말로 당시 미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막 시작된 냉전에서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토와 역사와 인구를 가진 중국을 공산주의 진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모든 전략에서 차질을 빚게 되었다. 

원래 미국의 판단은 장개석의 국민당이 무난히 중국을 통일하고 영국과 소련 다음으로 영향력을 가진 나라로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국민당과 장개석은 왜 모택동에게 패했을까? 이 주제에 대해 많은 학자들과 사람들은 오랫동안 연구를 거듭하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평화를 위해 마주 앉아 중경담판을 할 때만 해도 국민당의 우세가 훨씬 뛰어나 보였다. 그 담판 자체도 장개석이 모택동을 불러서 개최하였고 장개석의 주도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쌍십협정, 정전협정 등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서로 성격과 이상이 달랐던 두 지도자와 그들이 이끄는 정당의 가치관은 결국 양립할 수 없었으며 그 모순은 언제든지 터져 나올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문제는 1946년 4월 15일 소련이 중국의 장춘(현 길림성의 수도)에서 철수하자 한시간도 되지 않아 공산당이 장춘 공항을 점령하고 장춘을 접수했다. 이어서 하얼빈과 치치하얼 등 동북의 요충지를 공산당이 점령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정전기간 중에도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장개석은 1946년 11월 15일에 제헌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중화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장개석이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취임해버렸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격하게 반발하면서 전면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장개석은 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으며 국제사회에서 유일한 정부로 인정받았고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한편 모택동의 공산당은 중일전쟁 기간 세력을 확대하였고 동시에 부족한 무기를 소련이 철수하면서 공급받았기 때문에 군비에 있어서의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그러나 국민당에 비해 전력에서는 부족했던 공산당은 모택동의 전략과 전술을 통해 이를 만회할 수 있었다. 모택동은 크게 두 가지의 전술을 구사하였다. 첫 번째는 통일전선전술로 중국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혁명에서 많이 사용되는 방식이다. 이 전략은 자신의 주적을 설정한 이후 그에 적대적인 모든 세력을 연합하여 실력을 증강시키는 방식이다. 장개석에게 불만을 품은 사회 각 계층을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혹은 반부패를 외치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였다. 

둘째는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당시 중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농민들에게 토지개혁의 명분으로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고 혁명에 동참시켰다. 이를 통해 많은 농민들이 모택동이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공산당을 위해 총을 들고 국민당과의 전쟁에 참전하였다.  

자신의 실력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모택동은 장개석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1948년 10월 산동성의 수도인 제남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이때부터 전세는 급격히 공산당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어서 중국의 요녕성, 강소성, 북경과 천진 등 결정적인 세 번의 전투에서 승리한 모택동은 1949년 4월 양자강을 넘어 당시 국민당의 수도였던 남경을 점령하였다. 이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은 마지막 에필로그를 남겨두게 되었다. 

모택동은 28년간의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하여 북경의 천안문에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고, 전쟁에서 패한 장개석은 비통한 마음으로 그해 12월 대만으로 패주하여 중화민국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후 장개석은 1975년에 사망하였고 이듬해인 1976년에는 모택동이 사망함으로서 이들 모두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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