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 전쟁 이후 국제사회에서 청나라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고, 국내적으로도 황제의 통치가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져 들었다. 청일 전쟁 이후 독일이 산동성 지역을 점령하자 이 지역에서는 청나라는 물론이고 외세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원래 산동성과 화북지역은 자급자족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진과 연태가 개항되면서 서양의 값싼 면직물들이 밀려들자 이 지역의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게 되었고 농민들의 고통은 점차 가중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청도를 중심으로 철도가 부설되면서 전통 마을을 파괴하고 조상의 묘를 파괴하는 행위가 지속되었고 천주교의 빠른 성장으로 토착 세력에게 불안감과 불만이 쌓여갔다. 청일 전쟁이후 산동성 전체의 108개 지역에서 72개의 지역에 교회의 거점이 마련되었고 교회는 1300개에 달했다. 그리고 천주교의 신도는 8만명에 달했는데 교회 세력이 열강의 힘을 등에 업고 일반 민중에게 압박을 가했다. 여기에 영국군이 강제로 위해를 점령하고 조차한 것도 산동성 사람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게 했다. 

원래 의화단은 혁명세력은 아니었다. 이들은 산동지역을 중심으로 이전부터 의화권이라는 무술을 단련하는 집단이었다. 평소에는 부자들을 위협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행위들을 하여 민중들에게는 환영받는 입장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1808년에 의화권을 건전하지 못하고 백성들을 선동하는 종교로 간주하고 이들을 탄압하고 금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1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지고 민간에 침투하고 있었지만 어떤 통일된 조직을 가지지는 못했다. 

의화단이 본격적으로 세력화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이전부터 내려오던 백련교와의 결합에서 유교, 불교, 도교와 중국의 민간신앙이 결합하면서 무술을 하는 종교단체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 산동에 대한 열강의 침략이 심해지자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의화권은 의화단이란 이름으로 바뀌면서 비밀단체에서 공개적인 단체로 등장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의화단의 구성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로 농민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여기에 철도 노동자, 어민,  고향을 떠나온 유민 등 다양한 계층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조직은 각 마을 별로 있었고 중국의 팔괘(八卦)에 따라 여덟 개의 계통으로 구분되었다. 이들은 초기에는 청나라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열강의 침입이 심화되자 외국세력을 몰아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부청멸양(扶淸滅洋)’, 즉 청나라를 도와서 서양세력을 멸망시킨다는 구호로 세력을 확대했다.

의화단의 활동은 점차 산동성 전체로 번져갔으며 청나라 정부에서는 부청멸양이라는 의화단의 목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고 심지어는 이들을 비호하기도 했다. 의화단은 점차 힘을 얻어 가는 곳마다 교회를 불태우고 선교사를 죽이고 철도 등 서양의 것들은 무엇이든지 파괴하였다.

이들은 점차 수십명씩 수도인 북경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의화단이 북경에 들어오자 북경인들과 심지어는 관리들도 이들과 힘을 합치는 현상이 나타났다. 점차 북경에서 세력을 키운 이들은 10만명의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동시에 전국적으로 기독교와 열강에 대한 반대운동이 전개되었고 열강들은 청나라에 이를 진압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태후는 이를 거절하고 의화단과 힘을 합쳐 열강을 몰아낼 것을 결심하고 열강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과 독일 등 8개의 국가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북경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북경에 들어온 열강들은 11만명이라는 병력으로 의화단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의화단은 열강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었고, 청나라는 다시 열강과 신축조약을 맺어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어 청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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