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는 아편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강력한 적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내우외환에 빠져 있다가 양무운동을 통해 서양의 적들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형식에만 치우치는 모방에 그쳐 진정으로 실력을 키우지 못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청나라를 중화(中華)라고 부르고 자신을 소중화(小中華)라고 여기던 조선도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쇄국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 역시 서구 열강의 침략대상이 되었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이 일본에 대해 개항(開港)을 요구하자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도쿠카와 쇼군의 막부가 천황의 허가 없이 1854년과 1858년에 미국 및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막부와 천황세력은 대립하였고 결국 천황세력이 승리하여 메이지가 천황이 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가장 큰 목표를 유럽 열강들을 따라잡는 것이었고 이를 위한 다양한 개혁을 진행하였고 천황이 주도하는 국가자본주의를 통해 부국강병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상당히 빠른 시간내에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자 점차 유럽의 제국주의 흉내를 내면서 가까이 있던 조선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1876년 2월 일본은 조선을 협박하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고 부산, 원산, 인천의 3개 항구를 개방시켜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만들었다. 

한편, 조선의 실권자였던 대원군은 여전히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실각했던 대원군이 재집권하자 청나라는 대원군을 납치하고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에서도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으나 3일만에 원세개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개혁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 

조선 정부의 무능함과 탐관오리가 성행하게 되자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했다. 동학(東學)은 ‘서양의 것’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순수한 한국의 것을 지키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892년에 전라도 고부에 부임한 조병갑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분개한 동학은 농민들을 중심으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정읍, 고창, 무장 등을 거쳐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놀란 고종과 민비세력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일본 역시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에 파견하였다. 청나라는 약 3천명의 병력을 파병하였고 일본도 8천명의 병력을 인천에 상륙시켰다. 일본군은 바로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조선의 내정에 개입함으로서 청나라와 일본간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1894년 7월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던 아산과 성환쪽에 일본은 약 4천명의 군대를 보내 전투가 시작되었고 청나라가 패배하였다. 이후 양국은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하여 청일전쟁이 한반도에서 시작되었다. 일본과의 첫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 군대는 평양으로 후퇴하였으나 그 역시 일본의 승리로 돌아갔다.

청나라 군은 다시 압록강에 요새를 구축하고 일본과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에게 연전연패하였고 일본은 중국의 요동반도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여순항 등 수많은 도시들이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양무운동의 상징이었던 북양함대는 산동성의 위해(威海)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1895년 1월 20일에서 2월 12일까지의 전투에서 일본군의 공격이 계속되었고 결국 위해도 일본에 의해 함락되어 북양함대가 전멸하게 되었다. 

청나라는 더 이상 일본과의 전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 내용에서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이라는 조항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에서 청나라를 완전히 몰아내고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청일 전쟁을 통해 유럽 열강들은 청나라로부터 더 많은 이권을 빼앗아 갔으며 조선은 일본에게 직접적으로 유린 당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명성왕후를 살해하고 동학운동을 진압하였으며 동아시아의 주도권이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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