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형통 ‘(萬事亨通)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일이 뜻대로 잘 되어가는 것’이다. 자기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술술 풀려가는 만사형통은 모두가 원하는 바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만사형통은 그 의미가 다르다.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형통한 사람의 예로 요셉을 들 수 있다. 성경은 반복해서 그가 형통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세기 39:2).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세기 39:3). 또 다른 상황에서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세기 39:23)고 하였다. 

 
그러면 요셉은 정말 형통했을까? 요셉 개인으로 보자면 그리 형통한 삶은 아니었다. 위에 인용한 첫 번째와 두 번째 성경구절은 요셉이 노예로 팔린 후의 기록이다. 세 번째 성경 구절은 요셉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살아 돌아올지 기약이 없는 왕궁감옥에 갇힌 후의 기록이다. 
 
원래 요셉은 열두 형제들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아들이었다. 형들은 그런 요셉을 시기 질투하고 미워한 나머지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형들의 손에 의해 노예상인들에 팔려 고향 가나안 땅을 떠나 낯선 땅 이집트에 끌려 온 것이다. 당시 왕과 방불한 대 족장(族長)의 가정에서 태어나 값비싼 옷을 입고 모든 좋은 것을 누리던 요셉이 하루아침에 노예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운명을 탓하지 않았고 주어진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했다. 결국 가정 총무의 위치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왕궁 감옥에 갇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투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그의 성실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요셉은 감옥에서 바로왕의 노여움을 입어 수감된 신하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는데, 해석한 대로 복직하게 된 신하에게 한 자신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달라는 간절한 부탁은 몇 년 동안이나 잊혔고, 그는 감옥에서 오랜 수감생활을 해야만 했다. 
 
무엇이 요셉을 형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에 있다. 성경적 형통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있다. 인간의 바람대로 모든 일이 잘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 형통이다. 고난 중에도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형통이 있다. 
 
결국 요셉은 거대한 제국 이집트에서 총리가 되어 왕 다음의 큰 권세를 누렸다. 어떤 이들은 온갖 고난을 거쳤지만 입지전적인 성공을 이루었기 때문에 결국은 형통한 삶이 아니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요셉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것으로 성경은 그를 형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만사형통은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믿고 순응하여 사는 삶 자체를 의미한다. 그가 뜻을 알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믿고 묵묵히 인생의 길을 성실히 걸어 나간 것을 형통이라고 한다. 물론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의 성실함은 분명 성공의 밑거름으로 작용하였다. 요셉은 총리가 되어 고대 근동에 불어 닥친 큰 기근에서 자기 동족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였다.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한 만사형통을 꿈꾸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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