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과 남경조약을 겪으면서 청나라는 서양의 오랑캐들에게 패배를 당했지만 구중궁궐안의 황제와 권력자들은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부족한 세금은 아래로부터 더 거두어 들이면 될 것이고 서양의 오랑캐들은 청나라 황실 스스로가 그랬듯이 시간이 지나면 중국이라는 거대하고 우월한 문명에 동화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영국과 유럽은 이전의 유목민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유럽은 자기들 스스로의 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청나라에 비해 훨씬 선진 무기를 갖추고 있어 군사력으로나 문화적으로 이들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청나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고, 동시에 아편을 통한 자신들의 국부가 해외로 나가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힘없고 억울한 백성들에게 더 많은 세금과 부역을 강제하는 정책을 전개하였다. 
 
백성들은 어느정도 감내할 수 있는데 까지는 견디어 내지만 그 단계를 지나면 과감하게 그 정부에 대해 비난하거나 반란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정권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맹자(孟子)는 공자의 손자의 제자로 유교 사상을 완성하였고, 그는 여기서 ‘민본(民本)’사상을 강조하였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또 배를 전복시키기도 한다(水能載舟, 亦能覆舟)”라고 하였다. 즉 민심은 물과 같아서 좋을 때는 한없이 좋지만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민심은 물과 같이 점차 돌아서고 있었고 가장 큰 사건이 바로 태평천국의 난이다. 
 
태평천국은 중국의 역사속에 등장하는 황건적의 난, 홍건적의 난, 백련교도의 난과 같이 종교적 형식을 가지고 일어난 민란의 하나이다. 이 주동자는 홍수전(洪秀全)인데 청나라 말기의 광동성(廣東省) 출신이다.
광동성은 역사적으로 해외와의 교류가 가장 빈번한 도시였고 홍수전도 그 상황을 보면서 성장했다. 
 
그의 형제들 중 유일하게 서당에서 공부했고 또한 부모와 친척들은 홍수전이 과거에 급제해서 집안을 일으켜 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세 번의 시험을 모두 떨어지고 크게 실망한 그는 집으로 돌아와 큰 병을 앓았다. 그는 병중에 환상을 보았는데 어떤 노인이 그에게 다가와 홍수전에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인간 세상의 요괴와 악마를 제거하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그는 말이 없어지고 조금 이상스러운 행동을 하게 되었다. 
 
홍수전은 시험에 떨어진 후 6년이 지나 다시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또 낙방하였고 이때 이전에 길에서 기독교 포교를 하던 사람에게 얻은 ‘권세양언’이라는 책을 다시 꺼내 읽어 보았다. 책 안의 내용이 자신이 아팠던 시기의 환각과 일치하였고 자신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 요괴를 제거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이후 그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식이고 예수의 동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하나님 여호와를 ‘천부’로 예수를 ‘천형’이라고 생각하여 지금까지 공부해오던 공자와 맹자 등의 서적을 팽개치고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또한 집안에 있던 공자의 위패를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었다. 
 
비록 그가 성경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으나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이해하는 기독교 교의를 선전하고 ‘배상제회(拜上帝會 하나님을 모시는 회)’라고 칭했다. 홍수전은 “사람의 심성이 타락하고 정치가 부패하여 천하에 큰 재난이 닥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이 재난을 피할 수 있다. 상제회를 믿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평등하며, 남자는 형제이며, 여자는 자매이다”라고 자신의 배상제회를 포교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신의 배상제회에서 교의는 기독교를 모방하였고 태평천국의 십계(十誡)를 만들었다. 
 
처음에 시작했던 광저우에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고 그 옆에 있던 광서(廣西)지역에 가서 포교를 시작했다. 광동성보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던 광서 지역에서는 점차 세를 얻어가기 시작했고 홍수전은 광동성에서 세례를 받으려고 했으나 기독교에서 그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다. 홍수전은 다시 광서 지역으로 돌아와 배상제회를 부흥시켰는데 당시 지방 관리들과 마찰이 생기자 드디어 청나라에 반대하기로 결정하고 반란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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