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정부는 유럽의 무역에 대한 요청을 받아들여 중국의 항구중 광저우(廣州)를 개방했다. 중국의 광저우는 예나 지금이나 중국의 해외무역의 전진 기지이면서 동시에 중국의 관문 역할을 했다. 

 
지금도 광저우에는 매년 광교회(광주교역전람회)가 개최되는데 이때에는 세계 각국의 무역상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이 시기에는 시내의 호텔을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고 투덜거리는 상인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광저우 기차역을 중심으로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데 모두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도매시장이다.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4개의 특별경제구, 즉 주하이, 심천, 하문, 산터우 등을 설치하였으나 그 배후에는 광저우가 있어 ‘Made in China’의 제품을 생산하는 세계 공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비록 최근에 미중 무역 갈등으로 중국의 수출이 이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무역항으로 작동하고 있다. 
 
청나라 시기 역시 광저우는 중국 유일의 대외개방 창구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으나 지금처럼 자유로운 무역이 아니라 청나라 정부가 지정한 공행(公行)이라고 하는 특별한 기구를 통해서 가능했다. 공행은 정부의 허가를 받은 상인조합이란 뜻인데 당시 중국인들은 서양과의 교역을 담당한다고 해서 양행(洋行)이라고도 불렀다. 
 
청나라 정부는 직접 무역을 관리하고 세금을 걷는 것보다 이들을 통해서 세금을 걷어들이고 무역을 대행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정부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고 무역을 독점했다. 청나라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이 제도는 민간의 무역발전에 오히려 장애를 주었고 동시에 영국이나 유럽의 각국들도 공행을 통한 일방적인 무역 시스템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당시의 무역 상황을 살펴보면 영국은 산업혁명에 성공하여 자신들의 모직물을 중국으로 수출하려고 하였으나 중국의 일반적인 소비자들은 자급자족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서양의 제품들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유럽에서는 중국의 도자기와 차에 열광하고 있었다. 유럽 여행을 가보면 중국의 도자기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 유럽의 황실이나 귀족들은 자신의 한 방을 아예 중국의 도자기로 가득채워 자신의 부와 사치를 상징하는 것처럼 전시하고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유럽의 식기들을 보면 서민의 경우에는 대부분 나무로 만들었거나 흙을 구워 만든 토기를 사용하는 수준이었고, 귀족의 경우 은제품을 사용하는 정도였다. 고령토를 1000도가 넘는 가마니에 넣어 만들고 유약을 발라 광채가 나도록 만들어진 도자기를 본 이들은 거의 경외하는 수준으로 취급했다. 동시에 중국의 차는 유럽의 황실에서 시작하여 점차 서민으로 보급되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차가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 할만큼 필수품이 되었다. 
 
유럽에서의 중국의 도자기와 차, 그리고 실크의 수입은 급증하기 시작했고 반면 유럽제품에 대한 중국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그 결과 영국의 경우 남아메리카에서 얻은 은의 대부분이 중국에 흘러들어가는 현상이 발생했다. 중국은 은본위제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영국의 무역구조는 중국에게 훨씬 유리하게 편성되었다. 
 
이러한 무역역조를 타파하기 위해 영국의 상인들은 가장 부정직한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바로 ‘아편’이었다. 사람들이 쉽게 타락하고 중독되는 아편을 몰래 가져다가 중국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돈에 눈이 멀어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가장 추악한 밀수가 시작된 것이다. 이렇게 밀수로 들어온 아편은 빠른 시간에 중국 전역으로 번져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편에 중독되어 갔고 중국에서 지금까지 벌어들인 은들이 삽시간에 영국으로 다시 흘러들어갔다. 
 
청나라와 영국은 점차 아편 문제로 인해 긴장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공행들이 정부와의 결탁으로 건전한 무역시스템이 가동되지 않아 여러 가지 문제들이 광저우라고 하는 중국의 대외 창구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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