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씨시의 성 프란시스 수도회는 금식에 있어서 매우 엄격한 규정을 가지고 있는 단체였다고 합니다. 하루는 프란시스의 제자들이 선생께 와서 이렇게 제안합니다. “선생님 이번 사순절(예수의 생애를 기억하며 묵상하는 기독교의 절기)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끼씩 금식할 텐데, 우리는 그래도 명색이 수도사들 아닙니까? 좀 파격적으로 금식을 하기를 원합니다.”

선생은 대답하였습니다. “그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금식할 때, 따뜻한 죽 한그릇 을 올려놓고 기도하고 명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시스는 그렇게 하도록 허락 했습니다. 하루 이틀 금식의 시간이 지날수록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죽은 수도사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젊은 수도사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그만 죽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습니다. 순간 다른 수도사들이 몰려들어 그 젊은 수도사를 꾸짖기 시작합니다. 네가 예수님의 제자라면서 그것도 참지 못하느냐? 그러고도 네가 어떻게 수도사라고 할 수 있겠느냐? 너 때문에 우리 수도원의 전통이 깨어졌다느니 여러 말들로 소란스럽습니다.

그 일을 가만히 보고 있던 프란시스는 자기 앞에 있는 죽 그릇을 듭니다. 그리고는 한 번에 그 죽을 다 마셔 버렸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놀란 제자들을 향해 프란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아, 우리 굶고 미워하기보다는, 먹고 사랑하자’

모든 드러난 행위의 이면에는 그 행위 자체의 크기와는 비교도 안되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 속 깊은 사람은 눈앞에 벌어지는 행위로 사람 을 평가하지 않고, 그 이면의 울림들을 헤아려 봅니다.

기독교인들의 금식이라는 행위 역시, 그것 자체가 자랑이 되지 못합니다. 금식의 이면에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 랑’이라는 금식 자체와는 비교도 안되는 깊고 큰 의미가 있기 때문 입니다. 표면은 금식이요. 이면은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라면, 금식을 자랑한다는 건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우쭐댄다는 것일진대, 그건 말이 안되지요.

기독교인들에게 이번 주는 고난 주간입니다. 성탄절과 더불어 기독교 최대의 명절인 부활절을 앞두고 예수의 생애와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며 지내는 절기입니다. 교회들마다 특별 기도회도 하고, 금식도 하면서 이번 한 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부디 우리 기독교 인들의 한 주간의 행위들이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배제한 행위로서의 자랑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 입니다.

<분명히 다른 종교를 가지고 계신 독자들이 계실 텐데, 너무 기독교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글이 된것 같아 송구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든, 혹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건 그냥 없어져버릴 가벼운 입김 같은 것이기에, 오늘은 교회식(?)으로 한 말씀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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