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무의식적 욕망에 휩싸여 비이성적 행동을 하기도 하는 복합적 존재이다.

 
일반 심리학과 별개로 프로이트 이후에 활발하게 전개되어온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적 정신세계에 대해 집중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성적 사고를 인간 주체의 중심으로 파악한 데카르트적 사고를 무너뜨렸다. 그들은 인간의 심리를 좌우하는 것은 의식이 아닌 무의식이라고 주장한다.
 
문명 속에서 고통 받는 인간 삶의 여러 현상을 무의식으로 설명하는 대표적 정신분석학자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자크 라캉(Jacques Lacan), 그리고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을 들 수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적인 방어기제가 가장 약해지는 순간 무의식이 자신을 드러낸다. 꿈, 우연히 튀어나오는 말실수, 생각 없이 내뱉은 농담, 혹은 정신적 고통과 정신병의 증상들에서 무의식은 드러난다. 라캉은 이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이성 혹은 의식 자체가 사실은 무의식의 산물이라고 본다.
 
 프로이트에게 의식과 무의식은 이질적인 것이지만, 라캉에게는 의식과 무의식은 동질적인 것이다. 아무튼 정신분석학은 의식에 들어와 있지 않은 혹은 억압된 감정과 욕망, 생각 등이 인간 행동과 사고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잘 지적해 주었다. 그러나 그 무의식의 작용이 의식적 행동의 주체성을 부정하는데 까지 이를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융의 주장이 더 와 닿는다. 융은 다양한 임상경험을 토대로 정신분석학을 연구했다. 그는 한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집단무의식이 대립구도를 이루면서 이러한 대립 속에서 끊임없이 조화를 향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고 보았다. 융은 자아가 무의식의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그 목소리를 감지하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자기실현의 역사이다. 삶이란 자아가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 나인가? 아니면 날 것 그대로의 내가 나일까? 내가 보는 나와 다른 사람이 보는 나도 분명 다를 것이다. 나의 뒤 꼭지를 내가 보지 못하는 것처럼 정작 내가 모르는 나도 있다. 내 안에 잠재된 무의식의 세계는 또한 어떠할까? 결국 융의 주장처럼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종교나 윤리, 사회 담론 등 집단 무의식이 서로 역할을 하면서 자기실현과 심리적 성숙을 이루어 간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은 점점 철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인격이 성숙해지는 것일까? 그만큼 인격의 성숙, 인생의 무게감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며 살 일이다. 가을이다. 맑고 따가운 햇볕에 곡식들은 한참 익어가는 중이다. 어느 노랫말처럼 우리도 늙어가는 것이 아닌 익어가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언행심사가 어제보다는 좀 더 나아진 오늘이 되도록 가꿔갔으면 좋겠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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