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영락제는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내부적으로는 정적들을 제거하는 한편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다. 동시에 백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다양한 정책들을 실시하여 명나라의 토대를 완성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으며 북쪽의 몽골의 잔여세력과 여진족을 토벌하였고 티베트와 네팔,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 투르키스탄까지 조공을 요구하였다. 특히 영락제 시기에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당시의 환관이던 정화를 시켜 바다를 통한 해외와의 교류이다. 
 
정화를 중국에서는 중국인으로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 출신이다. 원래의 이름은 마화(馬和)라고 하였는데, 중국의 성씨 중에서 마씨는 대부분 조상이 이슬람으로 ‘무하메드’에서 그 성씨가 유래된 것이다. 
 
1382년에 명나라 군대가 운남성을 정복하였고 이때 북경으로 끌려와 거세된 후 환관이 되었다. 그는 환관이 된 후 영락제에게 귀속되었는데 영락제가 황제가 되기 위한 정변을 일으켰을 때 그를 따라서 공로를 세워 환관의 우두머리인 태감이 되었고 정(鄭)씨 성을 하사받았다. 
 
영락제는 정화가 이슬람 출신으로 중동지역을 잘 이해할 것으로 생각하고 대규모 선단을 조직하여 명나라를 세계 곳곳에 알리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지금의 중국은 정화가 처음으로 항해를 떠난 날인 7월 11일을 우리의 ‘바다의 날’과 같이 ‘중국항해일’이라고 기념하고 있다.   
 
정화는 모두 7차례에 걸쳐 대항해를 시도하였다. 중국 사료에 따르면 이 항해에서는 서태평양과 인도양의 약 30여개 국가를 방문했고 동남아와 동아프리카까지 다녀왔다고 기록되고 있다.   
 
첫 항해는 1405년 7월 11일에 출항했고 1407년에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다음은 부르나이, 태국, 캄보디아, 인도 등지를 방문하였다. 계속된 항해를 통해 방문한 지역의 수는 점차 증가하는데 말레이시아, 인도 등을 방문하였다. 4차 항해부터 본격적으로 원거리 항해가 시작된다. 남중국해를 넘어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의 케냐까지 방문하였고 돌아올 때는 기린을 가져왔다고 한다. 1431년에 출항한 7번째 항해가 마지막이 되었는데 정화는 인도의 서해안에서 1433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화의 대항해는 거리만 18만 5천킬로미터이고 동남아시아와 세계 각지를 방문하여 명나라를 널리 알리고 이들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정화의 대항해가 최근 몇 년간 부각된 이면에는 중국 정부의 정치적 의도가 다분히 녹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진핑의 일대일로, 그 중에서도 해상실크로드의 루트가 정화의 대항해와 겹치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해양진출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중국 정부는 정화의 일대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동시에 영화로도 만들어 중국인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역사에서 영락제때 정화에게 바다를 통한 해외 진출을 명했던 것은 사실이었고 실제 명나라가 동남아 지역과 무역을 했던 기록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 이후 명나라는 해금 정책을 통해 바다로 진출하는 것을 포기하였고 심지어는 바다로 나가다 잡힐 경우에는 엄벌에 처하기도 했다. 중국 스스로 해양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아버린 것이다. 
 
반면 유럽 여러 나라들은 신대륙의 발견과 해양을 통한 무역에 노력하여 점차 바다를 이해하고 그들의 국력을 키울 수 있었다. 스페인과 네델란드, 포르투갈 등 많은 유럽의 국가들이 앞다투어 바다로 진출했고 결국 영국이 해양을 제패함으로서 ‘팍스 브리타니카’를 이룰 수 있었다. 한편 중국은 스스로 외국과의 담을 쌓음으로서 이후 서양의 공격에 무기력하게 패배하게 되어 열강의 각축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저작권자 © 평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