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향후 10일간의 날씨 예보를 본 적이 있다. 헛웃음이 나왔다. 10일 동안 하루도 맑은 날이 없고 모두 흐림 아니면 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주 10일간의 날씨 예보도 지난주와 똑같다. 더구나 곳곳에 폭우로 인해 큰 피해가 있고 태풍소식까지 듣고 있자니 한숨이 나온다. 

올여름 상당한 폭염이 계속될 것이라는 장기예보가 있었다. “여름을 또 어떻게 나지?”하고 걱정했었는데 실제는 영 딴판이다. 가을이 시작된다는 입추가 코앞인데 이런 여름 날씨는 참 낯설다. 코로나 영향도 있겠지만 날씨만 보아서도 ‘피서철’이란 단어가 수상하기만 하다. 한창 뜨거운 햇빛을 받아 농작물이 영글어야 하는 때에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만 간다. 
 
이렇게 여름이 여름답지 않게 된 것은 왜일까? 누구나 인정하듯이 인간의 책임이 크다. 무분별한 자연의 개발이 자연을 자연스럽지 못하게, 즉 자연답지 못하게 했다. 그러한 결과가 자연답지 않은 환경 대재앙으로 다가온 것이리라.
 
‘답게’라는 말은 자연스러움과 책임감이 잘 버무려진 단어이다. ‘아름답다’라는 말에도 ‘답게’의 표현이 들어있다. 어떤 분야든 그것 그대로의 본성에 걸맞은 모습으로 나타날 때 ‘다움’의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오래전 동양철학 시간에 배웠던 논어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논어 안연(顔淵)편에서 공자가 말한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이다. 임금은 임금 노릇 하며, 신하는 신하 노릇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 하며, 자식은 자식 노릇을 하는 것이 곧 바른 정치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다움’이 ‘다움’으로 남을 때 사회는 더 건강해진다. 
 
요즘 정의당이 발의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겁다. 기독교계는 대부분 이 차별금지법을 결사반대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반대가 유별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차별을 찬성한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다. 차별금지법에 담긴 거의 모든 조항의 차별을 그 누구보다도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다만 거기에 슬쩍 끼워 넣은 성소수자의 차별조항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다. 동성 간의 성적 결합은 자연스러움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자연스러움을 파괴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남자들과의 자연스러운 성 관계를 여자와 성 관계를 갖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이와 똑같이 남자들도 여자들과 행하는 자연스러운 성 관계를 버리고 남자들끼리 정욕에 불타, 남자가 남자와 부끄러운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그 잘못에 합당한 벌을 받았습니다.”(로마서 1:26-27). 
 
자연을 파괴한 결과를 지금 우리가 다 경험하고 있듯이, 남자와 여자의 자연스러움과 질서의 경계가 무너진다면 이에 못지않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우리나라에 에이즈 환자 대부분이 남성이고, 그 대부분이 동성 간 성적 접촉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성소수자들을 혐오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많은 사랑과 관심과 인내와 회복과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다만 ‘다움’을 파괴하고 질서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조화롭게 가꾸고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그나마 망가진 세상을 바로 세우고 치유하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다움의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자연이든 그 안에 있는 사람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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