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스칸과 그 후예들이 역사에 남을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당시 고려에게는 너무나 벅찬 상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40년간 그리고 수차례의 대규모 공격을 막아냈던 역사를 보면 우리 민족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얼마나 강한 민족인지를 새삼 깨닫게 해준다. 

 
한족의 송나라는 금나라가 멸망한 후 몽골의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송나라도 초기에는 맹공이라는 장수가 몽골의 침략을 잘 막아냈으나 훗날 간신이었던 가사도가 재상직에 오르면서 송나라의 힘은 빠르게 약화되었다. 1276년 지금의 항주인 수도 임안이 함락되었고 송나라는 지금의 홍콩 부근까지 도망가면서 전투를 계속했으나 결국 당시의 어린 황제와 황족들 그리고 신하들이 함께 자살함으로서 300년간 우여곡절을 겪었던 송나라는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금나라에 망한 거란족 일부가 평양의 동쪽 지역을 침입하여 거주하자 1216년 이들을 쫓아온 몽골과 고려가 최초로 조우하고 협력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이러한 협력을 통해 거란족을 소탕하였으나 몽골은 고려에게 과다한 공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고려는 몽골에 대해 점차 적대시 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몽골의 사신이었던 저고여가 국경지역에서 살해되자 몽골은 고려가 죽였다고 트집을 잡으면서 고려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1231년 몽골은 고려에 항복하라고 요구하였으나 고려가 거절하자 드디어 대규모 병력을 보내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몽골제국의 살리타가 이끄는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귀주성을 수차례 공격하였으나 함락되지 않자 길을 돌아 당시 수도인 개경을 포위하였다. 고려 왕실은 할 수 없이 강화조약을 맺었고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제1차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고려는 1232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장기전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몽골의 항복을 거부한 고려는 결사 항전을 시작했고 당시 몽골의 장군이던 살리타가 지금의 용인인 처인성에서 전사하자 몽골군들은 패주하였다. 제2차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것이다. 
 
1235년에 몽골은 제3차 고려 침공을 시도한다. 이때 전국을 몽골군들이 침략하여 약탈하였으나 강화도는 함락시키지 못했다. 고려는 불교의 법력으로 이들을 물리치고자 팔만대장경을 다시 만들었다. 고려 조정은 전국이 유린당하고 있자 다시 몽골에게 화해를 요청했고 고려의 왕이 입조(入朝)한다는 조건으로 몽골군이 철수하였다. 
 
1251년 고려는 몽골군이 철수하자 왕의 입조와 강화도에서 나온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몽골은 제4차 침공과 제5차 침공을 시도했다. 고려군이 충주성에서 70여일간 끈질기게 버티자 결국 불리해진 몽골군이 또 다시 고려에서 물러났다. 
 
1254년 고려가 끝까지 왕의 입조를 거부하자 다시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고 충주와 상주전투에서 몽골군을 막아냈다. 그러나 이때 포로가 20만명이나 끌려갔으니 사상자와 피해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럼에도 끝까지 항복을 하지 않자 이어서 제7차, 8차에 걸쳐 고려를 공격했다. 
 
몽골의 제9차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때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당시 원종이 결국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수도에 입조하였고 1270년에 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역사상 몽골제국의 9차례에 걸친 공격에도 당당하게 맞서서 싸운 나라는 고려가 거의 유일무이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부마국이라는 이름과 몽골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으나 고려는 그 정통성을 이어갈 수 있었다. 만약 이때 몽골 제국에 편입되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없었을지도 모르는 중요한 역사의 순간이었다. 
 
특히 고려와 몽골의 전쟁에서 왕족과 귀족들이 강화도에 도망간 상태에서도 가장 하층민이었던 노비들과 농민들이 스스로 군대를 조직하여 몽골군에게 저항하여 이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역사적으로 보면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정부의 안일함과 무능함에도 나라를 지킨 가장 큰 힘은 바로 민초(民草)들이었고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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