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가 약해지고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워 그 기세가 등등하고 있었다. 거란족이 916년에 요나라를 세웠고, 한반도에는 918년에 고려가 세워졌으니 거의 비슷한 시기였다. 반면 거란의 요나라는 916년에서 1125년까지 유지되었으나 고려는 918년에서 1392년까지 요나라보다 약 200년을 더 유지하였다.  

 
고려는 후삼국시대를 거쳐 태조 왕건이 한반도를 통일하였고 그 뿌리는 고구려에 있다고 생각하여 국가의 명칭도 고려라고 지었다. 당시 중국의 한족 국가였던 송나라와 거란족의 요나라 간에 첨예한 갈등이 존재하여 수시로 전쟁이 벌어졌다. 
 
요나라는 자신의 후방에 고려라는 막강한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처음에는 화친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요나라를 건국한 야율아보기는 고려에 낙타와 말을 보내 고려의 환심을 사려는 노력도 시도했다. 그러나 고려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세운 발해가 926년에 요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요나라를 적대시 하게 되었다. 
 
942년에 요나라의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고 화친을 요구하였으나 왕건은 사신은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라는 곳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또한 요나라의 공격에 대비하여 30만명의 군대를 양성하고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송나라는 요나라의 공격에 대해 고려와의 동맹을 추진하면서 요나라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펼치고 있었다. 고려 역시 요나라 보다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였고 무역과 다양한 왕래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때 요나라가 발해의 후손들이 다시 세운 정안국을 986년에 멸망시키자 고려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서로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드디어 993년에 고려와 요나라와는 말만이 아닌 무력 충돌이 시작되었다. 고려와 요나라간에는 크게 3차례의 전쟁이 있었다. 그 첫 번째 전쟁에서 요나라는 6만명의 군대를 보내 고려를 공격했다. 첫 번째 공격에 불리해진 고려 내부에서는 화친론과 주전론의 의견이 엇갈렸다. 이때 요나라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고려에 다시 화친을 제안했다. 
 
주전론자였던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으므로 요나라의 동쪽 지역 땅도 원래 고려의 것이라고 주장하여 강동 6주를 얻어냈다. 대신 형식적으로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는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 
 
1차 전쟁 이후에도 고려가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 강동6주도 돌려주지 않자 명분을 찾아 1010년 요나라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였는데 2차 전쟁이었다. 초기에는 요나라가 개경까지 함락시켜 성과를 거두었으나 개경으로 이어지는 긴 보급선이 끊어져 고려와의 전쟁이 어려워지자 고려의 왕이 요나라를 방문한다는 조건으로 전쟁을 중지하였다.
 
요나라는 2차 전쟁 이후에도 고려가 강동6주도 돌려주지 않고 고려의 왕도 방문하지 않고 심지어 송나라와의 교류를 계속 하는 것에 분개하여 1018년에 다시 10만의 병사를 보내어 3차 공격을 시도했다. 고려도 이에 굴하지 않고 강감찬을 상원수로 하고 강민첨을 부원수로 하여 20만명의 군으로 하여금 요나라의 공격을 막아내도록 하였다. 
 
요나라는 압록강에서 고려군의 저항에 막히자 우회하여 수도인 개경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요나라군은 강감찬의 청야전술에 걸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청야전술은 적이 공격해오는 지역의 모든 것을 불태워 적들이 식량을 얻을 수 없도록 하는 전술이다. 이 전술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공격과 히틀러의 소련 공격 때 사용하여 프랑스와 독일에게 승리의 계기가 된 전술이다. 
 
요나라군은 개경을 100리에 두고 더 이상의 진격을 하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강감찬의 고려군은 이들의 퇴각로에 미리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귀주에서 요나라군을 전멸시켰다. 10만명의 요나라군 중에서 살아서 돌아간 자가 수천명에 불과했다. 
 
이후 요나라는 다시는 고려에 대해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고려는 국경을 압록강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귀주대첩으로 송나라와 요나라 그리고 고려가 정족지세를 이루었고, 귀주대첩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권율의 행주대첩, 이순신의 한반도 대첩과 함께 한민족의 4대 대첩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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