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이 죽고 아들인 고종이 아버지의 후궁인 무조를 자신의 왕비로 들였다가 그녀에 의해서 황궁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또 자신의 아들이었던 중종 이현을 폐하고 나라의 이름도 무주(武周)라 하여 무씨의 천하가 되었다. 이후 이현은 705년 측천무후가 죽고 다시 황제가 되었으나 황후와 딸 안락공주에게 독살 당했고 그의 아들 이중무를 황제로 세웠다. 

 
이에 황친이었던 이용기는 황후와 공주를 죽이고 자신의 아버지를 황제로 삼았으며, 그 아버지 이단은 권좌를 바로 이용기에게 물려주고 퇴위하였다. 이 이용기가 당나라의 현종(685년~762년)이다. 이용기는 황제가 되자 자신과 결탁하여 황후와 그 일가를 몰살시켰던 태평공주도 자신의 자리를 넘본다고 생각하여 태평공주와 그 일당을 모두 죽여버렸다. 
 
당나라의 역사는 최소한 이 현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황실내에서는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부모 자식, 형제간의 골육상쟁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거기에는 바로 양귀비가 있었다. 
 
우리가 중국의 미녀로 손꼽는 네명의 여인들은, 서시, 왕소군, 우희 그리고 양귀비이다. 양귀비(719년~756년)는 성은 양씨였고 이름은 옥환이었다. 양옥환은 친척의 결혼식에 초대 되어 갔다가 당현종의 18째 아들인 이모의 눈에 들어 16살의 나이로 황자인 이모와 혼인을 하였다.  
 
현종의 환관이었던 고력사는 현종이 상처한 후 실의에 빠져있자 이를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현종을 아들의 처인 양옥환을 만나도록 하였다. 지금도 서안의 유명한 관광지인 화청지에서 양옥환을 본 현종은 바로 사랑에 빠졌고 아들의 여자를 탐하기 시작했다. 현종은 양옥환을 화산(華山)의 도사로 출가시켰고 이후 궁내에 도교 사원을 건설하여 궁내로 끌어들였다. 이때 양옥환은 22살이었고 현종은 57살이었다. 
 
몇 년 후 양옥환에게 귀비라는 직함을 내리고 자신의 옆에 두도록 하였으니 그가 바로 양귀비이다.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당나라는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양귀비를 천거했던 환관 고력사와 양귀비의 오빠들은 현종이 정사를 게을리하게 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양귀비에게 세명의 오빠들이 있었는데 모두 높은 관직을 주었고 국정을 전횡하기 시작했다. 
 
이때 양귀비의 친척이었던 양국충은 군인으로 현종의 신임을 받아 40여개의 관직을 독점하고 사리사욕에 눈이 멀었고 관리 등용에 있어서도 뇌물이나 혹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기회를 주어 그에 대한 원성은 양귀비와 현종에게까지 고스란히 이어져 갔다. 
 
양귀비는 당시 또 다른 장군이었던 안녹산과 친한 관계였는데 양국충과 안녹산간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원래 안녹산은 우즈베키스탄 출신으로 공을 세워 현종의 신뢰를 얻고 있었고 또한 양귀비와도 친하자 양국충은 그를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이를 알아챈 안녹산은 자신이 거느리던 15만 병력을 동원하여 오히려 장안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낙양을 점령하고 자신을 황제라고 칭했고 그 기간은 거의 10년이 되었다. 안녹산이 군사를 일으킨 명분은 양국충 토벌이었다. 양국충은 현종을 사천성으로 피신시켰는데 당시 수도에 살고 있던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도망을 쳤기 때문에 그 불만과 불신이 팽배했다. 
 
결국 불만에 가득찬 군인들은 양국충을 처형했고, 그들은 현종에게 양귀비도 죽일 것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버티던 현종도 양귀비를 추천했던 고력사의 말을 듣고 더 이상 보호할 수 없게 되자 양귀비는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이후 현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당나라는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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