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안시성이란 영화가 개봉되어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받은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란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안시성은 단순히 영화를 넘어 한국과 중국관계의 오랜 역사를 우리들 스스로 한번쯤은 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약 700년의 역사를 유지한 동북아시아에서 패권을 유지한 국가였다. 만주, 한반도 북부, 러시아의 연해주와 몽골 동쪽까지 그 영토가 광대했으며 한족, 거란, 돌궐, 말갈, 선비족 등을 정복한 제국이었다. 
 
중원의 숱한 공격과 침략에도 고구려는 여전히 굴하지 않았고 오히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는 중원의 중국 왕조들보다 훨씬 더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구려를 넘보던 수나라는 4차례나 공격하였지만 모두 패배하였고 그 무모한 전쟁으로 인해 명을 다하고 새로운 왕조인 당나라가 건설되었다. 
 
당나라를 세운 고조도 고구려의 강성함을 두려워하고 고구려와 화친을 맺어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반면 그의 아들 태종 이세민은 국력을 증강시키고 서쪽 지역의 유목민족 국가들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 태종의 이러한 야심을 알고 있던 고구려는 당과 고구려의 국경을 따라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이 천리장성의 건설을 맡은 장군이 연개소문이었는데, 그는 중국에 대해 강경한 외교노선을 주장하였다. 반면 고구려의 온건파 귀족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생각하여 중국과 화친을 거듭 주장하고 동시에 자신들의 뜻에 거스르는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를 미리 안 연개소문은 병력을 동원하여 왕과 귀족들을 모두 제거하고 스스로 대막리지의 자리에 올랐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은 후 고구려의 대당정책은 더욱 강경책으로 변화되었고, 남쪽에 있는 신라에 대해서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중에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했던 것을 기억하여 신라를 압박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공격에 두려움을 느끼고 당나라에 원조를 청하였다. 당태종은 다른 나라들은 모두 정복하였으나 여전히 고구려에 대해 감히 전쟁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를 기회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644년 당나라는 50만 명의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였고 수송부대까지 합치면 100만 대군을 고구려와의 전쟁에 투입하였다. 당 태종의 명령을 받은 당나라 군은 요동을 향해 세 갈래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선발부대가 18만 명이었고 당태종은 앞뒤로 60만 명을 이끌고 우너정길에 올랐다. 
 
당나라와 고구려의 국경이 맞닿은 현도성은 쉽게 함락이 되었고 고구려 영토내의 첫 번째 요지인 신성을 공격하였다. 신성이 쉽게 함락이 되지 않자 군량이 보관되어 있던 개모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또한 요수의 남쪽 지역에 있던 건안성을 급습하여 당나라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산동성의 동래에서 출발한 수군들이 바다를 건너 비사성을 습격하여 비사성도 함락시켰다. 
 
당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의 시작은 월등한 물량과 100만의 군대로 물밀 듯이 밀려들어 고구려를 점차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실제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강한 국력과 군대를 가지고 있던 당나라를 이겨낼 나라는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태종은 그 기세를 몰아 요동성 최고의 중심지인 요동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성을 수백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특히 당나라 군이 사용한 포차는 그 위력을 발휘하였고 마침내 요동성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안시성을 함락시키면 압록강을 넘어 바로 수도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당태종은 안시성이 공격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자신의 친위부대를 포함하여 56만명의 병력을 집결하여 공격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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