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민은 형제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유폐시킨 후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바로 당나라의 영토를 확장했던 당태종이었다. 당태종은 남북조와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의 세력과 영토를 확장하는데 그 정책의 우선 순위에 두었다. 

 
한반도와 중국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중국이 통일 되거나 강성했을 때 호시탐탐 한반도에 대한 침략의 야심을 드러냈다. 수나라와 당나라 모두 중원을 통일한 후 북동쪽의 요동지역에 위치한 강력한 대국이었던 고구려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수나라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유증으로 멸망하였고 그 이전의 중원의 제국들이 고구려를 수차례 공격하였으나 항상 패배하였다. 
 
당나라의 태종도 황제에 오른 후 고구려를 공격하고 싶었으나 그 역량이 미치지 못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중국의 서북쪽에 대한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당나라 건국 초기 자신들의 숙적이던 북쪽의 돌궐을 우선 공격목표로 삼았다. 
 
돌궐(突厥)은 중앙아시아의 아무다리야강과 카스피해의 부근의 초원지역에서 생성되었고 자신의 왕을 카간(可汗)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알타이 산맥과 천산산맥을 배경으로 유목생활을 영위했던 흉노족의 일파로 알려져 있다. 
 
돌궐족은 훗날 오스만 제국과 현재의 터키와 연계되어 있다는 학설이 많이 알려져 있다. 돌궐에서 파생된 투르크라는 말은 ‘강하다’라는 뜻으로 돌궐족은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연결되는 초원지역의 정복자로 활동하였고 몇 개의 국가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였다.  
 
북방 초원 지역의 정복자였던 돌궐은 남북조 시기에 선비족이 세운 북주와 북제를 복속시키고 수시로 수나라와 당나라와 충돌을 하였다. 6세기 후반에 돌궐은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리 되었고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당나라의 태종은 돌궐 지배의 지역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하였고 비단길의 주요 통로를 장악하게 되었다.  
 
서돌궐과 동돌궐의 사이에 또 하나의 국가가 실크로드의 동서를 이어주면서 번성하던 국가가 있었다. 중국의 역사에서는 한나라 이후 이곳에서 둔전(屯田)을 하고 병력을 주둔하였기 때문에 고창국(高昌國)을 세운 것이 마치 한족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은 한나라 이후 수백년을 분열의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중국측 주장에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고창국을 건설하고 유지했던 민족은 비록 지금 기록이 없으나 최소한 유목민족의 일파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고창국은 세계에서 가장 해발이 낮은 투르판에 위치하고 있다. 투르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아직도 고창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서유기에서 삼장법사가 지나갔던 곳이기도 하다. 고창국은 인도로부터 불교가 중국으로 유입되는 길목에 놓여있고 사막 가운데의 오아시스 지역이다. 만약 중국의 서역지역을 여행할 경우가 있으면 여름날 50도가 넘는 뜨거운 열기를 천산의 얼음물을 지하로 끌어내려 포도와 다른 작물을 경작했던 인공수로인 카레즈를 구경할 수 있다. 
 
640년 당태종은 고창국을 멸망시킨 후 안서도호부를 고창국의 수도였던 투르판에 설치하여 서돌궐의 침입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돌궐의 공격으로 쫓겨나 다시 둔황으로 옮기게 되었다. 
 
서쪽 지역을 평정한 당태종은 한편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국력을 키워나갔다. 우선 대부분이 농민이던 당시 상황에서 조용조(租庸調)라는 법을 만들어 농민이 일정부분의 조세와 부역을 담당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태종의 정책은 당나라의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켰으며, 과거제도도 시행하여 인재를 양성했고 군사제도는 부병제를 실시하여 부국강병에 성공하였다. 당태종은 수나라와 그 이전의 역사에서 국가를 경영하고 민심을 얻는 법을 배워 실천했다는 점과 영토 확장을 이전의 2배로 늘려 중국에서는 높게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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