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의 오랜 분열을 깨뜨리고 북쪽의 유목민 계열의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수양제의 사치와 향락, 과도한 토목 사업과 4차례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모두 패배하여 40년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수나라 시기 북쪽에는 돌궐과 또 다른 유목민족들이 호시탐탐 중국의 국경을 넘어 약탈을 감행하고 있었고 그들을 막아내기 위해 많은 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그 중 훗날 당나라를 건국하게 되는 이연의 아버지인 이병은 수문제의 이종사촌으로 당국공(唐國公)의 작위를 받았으며, 당(唐)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하게 된다. 
 
이연은 617년에 군사의 요충지인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태원은 지금 산성성의 도읍이며, 이후 명나라 시기에도 북방의 만리장성과 연결되는 중요한 지역으로 유명한 산서상인을 배출하게 된 곳이다.  
수양제는 태원을 지키던 이연에게 북쪽 돌궐의 공격을 방어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미 수나라의 왕권은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과 돌궐의 공격에 약화되어가고 있었다. 돌궐의 수장이 공격을 해왔을 때 이연이 군사를 이끌고 이를 막아 보려고 하였으나 전투마다 패해 자신의 지위가 어려운 지경에 놓여있었다. 
 
이연에게는 네명의 아들이 있었고 그중 둘째 아들인 이세민(훗날 태종)이 가장 총명하고 이연을 가장 많이 도와주고 있었다. 이연은 자신의 친한 친구였던 유문정이 농민반란군과 연루되어 감옥에 갇혀 있어 그를 면회하였다. 이때 유문정이 이세민에게 현재 수나라는 그 운명이 다하였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으니 자신과 힘을 합치면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이세민은 자신의 아버지인 이연을 찾아가 지금의 힘으로 돌궐이나 반란군을 제거하지 못하며, 만약 그렇게 되면 오히려 황제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으니 선수를 쳐서 수나라를 공격하자고 설득했다. 돌궐에게 패해 의기소침하고 황제의 탄핵을 두려워하던 이연은 이세민의 말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연은 자신이 대장이 되고 장남 이건성과 차남 이세민, 그리고 감옥에서 빼온 유문정과 함께 병사를 이끌고 태안을 떠나 장안으로 진격했다. 그 과정에서 수나라에 반발하던 많은 농민들과 유민들이 합세하여 병사가 20만명으로 증가하였다. 수나라의 군대는 이미 사기가 저하되어 감히 대항하지 못하여 장안은 이연의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장안을 점령한 이연은 백성들의 민심을 얻기 위해 수나라의 악법을 모두 폐지하고 새로운 12조의 법을 선포하고 동시에 수양제의 손자 양유를 이름만 있는 황제로 세워놓았다. 한편 피신을 떠났던 수양제는 자신의 부하에게 비참하게 피살되었다. 
 
수양제가 죽자 이연은 선양의 형식을 빌어 새롭게 황제에 등극하면서 나라의 이름을 당나라로 정했다. 이때가 618년으로 이후 907년에 멸망할 때까지 당나라가 지속되게 된다. 황제에 오른 이연은 자신의 장자였던 이건성을 황태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세민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이건성은 동생들과 연합하여 이세민의 부하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이세민을 암살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자신을 암살하려던 계획을 미리 알아차린 이세민은 당시 왕궁의 북문이었던 현무문(玄武門)으로 이건성과 이원길을 유인하여 선수를 쳤다. 이때 이 두형제가 저항하였으나 모두 이세민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세민은 자신의 아버지인 고조 이연에게 형과 아우가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제거하였다. 
 
동시에 이세민은 자신의 아버지인 고조를 태상왕으로 올리고 별궁에 유폐시켰으며, 두달 후 자신이 양위를 형식을 빌어 황제가 되었으니 바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안시성에서 패배한 당태종이다.
 
수나라의 양제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황제가 되었듯이 당태종도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권력을 빼앗는 골육상쟁의 전례를 남겼다. 이후 중국의 역사에서 부자지간이나 형제지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이 권력이란 말이 전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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