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중반부터 등장했던 사마의(司馬懿)의 자식들이 위나라의 권력을 찬탈하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다시 손자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으니 그 이름이 진(晋)나라이다. 진나라는 크게 서진과 동진으로 나뉘어진다. 사마의의 직계가 무너진 것은 266년에 서진을 세우고 316년에 멸망했으니 사실은 50년의 짧은 기간이었다. 이후 사마씨의 후손이 다시 지금의 남경이란 곳에 동진을 세웠는데 420년까지 이어졌다. 

 
사마의가 위나라에서 실제적인 권력을 빼앗은 후 263년에 아들 사마소는 촉한을 공격하였고 당시 촉한의 대장군 강유가 패배하자 유비의 아들 유선이 투항함으로서 촉한은 그 운명을 다하였다. 이 공로로 사마소가 진왕(晋王)이란 작위를 받았고 얼마 후 그 아들 사마염이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진(晋)나라를 세웠을 때 이 명칭을 계속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진나라는 도읍을 낙양에 정하고 다시 오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279년 드디어 오나라의 내정이 혼란한 틈을 타 공격하여 오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여 삼국시대의 막을 내렸다. 사마씨가 세운 진나라는 출발이 권력을 찬탈하면서 시작했기 때문에 백성들과 관리들이 겉으로는 복종했으나 내심으로는 이들을 경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쉽게 권력을 얻는 사마씨들은 능력있는 자를 배제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친인척을 관리로 등용했다. 그래서 진나라를 개국한 개국공신의 대부부은 능력도 없고 덕도 없는 인물들로 넘쳐났다. 사회는 사치와 탐욕이 끊이지 않아 전통적인 한(漢)나라 시기의 능력있는 자를 등용하고 소박한 삶을 추구하던 가치관이 무너져 내렸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 진나라는 자신들의 친인척들에게 영지를 분할해주어 각 지역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진의 무제 자신은 능력도 없으면서 사치와 향락에 빠져있었다. 특히 여자를 좋아하여 궁녀를 뽑기 위해 전국에 결혼 금지령을 내리고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후궁과 궁녀들을 모두 자신이 데려와 당시 후궁에는 거의 1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무제가 죽은 후 혜제가 왕이 되었는데 그 역시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이를 틈탄 외척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많은 백성들이 굶어죽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어리석은 황제는 “왜 고기를 먹지 않는가?”라고 할 정도였다. 
 
외척들의 횡포와 압박에 여러 곳에서 왕을 하고 있던 사마씨의 후예들이 반란을 일으키키 시작했다. 이 당시 8명의 사마씨들이 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팔왕의 난(八王之亂)’이라고 한다. 같은 성씨의 친척들이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골육상쟁을 벌였다. 결국 그 중 동해왕이라 불리던 사마월이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시기 중원이 혼란한 틈을 타 북쪽에서 기회를 엿보던 유목민족들이 조금씩 중원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원래 한나라의 무제가 군사력으로 자신들을 밀어내고 영토를 빼앗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중원의 각 세력들은 일단 자신들이 살기 위해 유목부족들과 결탁하기도 하였으나 이것이 기회가 되어 점차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한 것이다. 
 
특히 흉노족의 수장이었던 유연은 국호를 전조(前趙)라고 지었다. 이때부터 중국을 5호16시대라고 부른다. 한족에게 억눌려 있던 각 민족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국가를 세우기 시작했다. 유연은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아들 유총에게 낙양을 공격하도록 하였고 각지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유연이 죽은 후 유총은 자신을 황제라고 칭하고 본격적으로 진나라를 공격하여 진의 황제와 관리, 백성 등 3만여명을 살해하고 낙양을 함락시켜 서진은 멸망하고 말았다. 
 
중국의 역사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통일과 분열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진다. 중국의 한족 세력이 통일을 하고 국력이 강할 때는 주변 국가들을 공격하지만, 반대로 국력이 약해지면 주변의 유목민들이 중원을 공격하여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기도 하였다. 우리가 아는 몽골족의 원나라와 여진족의 청나라가 대표적이다. 
저작권자 © 평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