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를 읽다보면 제갈량이 상대방을 통쾌하게 이기지 못하는 장면들이 나올 때 마다 마음을 졸이곤 하는데, 그 대상이 위나라의 책사 사마의(司馬懿)였다. 그는 신출귀몰한 제갈량의 전법을 꿰뚫어 볼 줄 알았고, 최소한 제갈량을 이기지는 못해도 지지는 않는 묘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삼국지나 후세 사람들이 제갈량만 인정하고 사마의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갈량은 가지고 있지만 사마의는 가지지 못한 충성심 때문일 것이다. 제갈량은 죽는 순간까지 유비가 자신을 삼고초려 했던 것을 잊지 않고 그 아들에게도 섬김을 다하였다. 제갈량은 후출사표에서 “힘을 다해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고 죽음에 이르면 멈추겠다(鞠躬盡瘁, 死而後已)”고 약속했고 그가 오장원에서 병사할 때까지 자신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반면 사마의의 재능은 제갈량만큼 뛰어났으나 그는 처세에 능하고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아 결국 주군을 배신하였기 때문에 그를 후세에서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반드시 정의가 승리하지 않는 법, 오히려 역사는 인과응보와 윤회적인 되풀이를 계속 보여주기도 한다. 
 
사마의의 집안은 원래 한나라 관료 출신으로 아버지 사마방은 경조윤(京兆尹)이라는 높은 관직을 지냈고 자식을 잘 교육하여 8명의 아들 모두 뛰어나 사마팔달(司馬八達)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사마의가 가장 뛰어났고 이를 안 조조가 그를 자신의 수하에 두려하였으나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결국 위협에 못이겨 그의 밑으로 들어갔다. 
 
조조는 사마의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옆에다 두었으나 결코 그를 믿지 않았다. 조조가 보기에 사마의가 제갈량을 감당할 능력이 있으나 자신의 사람이 될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조는 아들 조비에게 “사마의는 결코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니다”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비가 어렸을 때부터 사마의와 친했기 때문에 조조가 죽고 난 후에도 사마의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높게 중용하였다. 
 
제갈량과 사마의간의 대결에서 보면 사마의는 항상 제갈량을 이기지 못했고 심지어는 제갈량이 죽은 후 제갈량의 가짜 목상에 쫓겨 달아나 “죽은 제갈량이 사마의를 쫓아냈다”라는 말이 전해질만큼 후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제갈량의 6번에 걸친 위나라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사마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드디어 자신이 황제가 되어 위(魏)나라로 국호를 칭했는데 재위한지 7년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는 죽으면서 조예에게 왕권을 넘겨주었고 사마의에게 후사를 부탁했다. 그 조예도 34살의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당시 8살인 조방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이후 왕실의 측근인 조상과 사마의간에 암투가 벌어지는데, 결국 사마의가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조씨 일가를 멸하기 시작했다. 이후 실권은 모두 사마의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조조의 불길한 예측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이후 촉한이 263년에 멸망하게 되고 오나라가 280년에 멸망하는데, 위촉오 중에서 오히려 위나라의 허수아비 황제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망한 것이 위나라라고 할 수 있다. 사마의가 72살의 나이로 죽자 그의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 순으로 권력이 승계되었다. 
 
사마소도 갑자기 죽게되고 그 아들인 사마염이 위나라 황제 조환에게 선양(禪讓)을 받아 나라를 세우니 바로 진(晋)나라이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운 위나라는 결국 개국공신이었던 사마의에 의해 권력을 찬탈당하고 멸족하게 되니 마치 한나라의 헌제를 폐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었던 것과 같은 일을 당하게 되었다.  
 
역사는 권력을 빼앗은 자 역시 그 권력을 같은 형식으로 빼앗기게 되니 인과응보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마염이 세운 진나라 역시 50년도 채 되지 않아 북쪽 유목민들에게 멸망하게 되었다. 이후 중국은 오랜 기간 동안 분열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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