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의 명언이다. 무지(無知)의 지(知), 즉 자신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기를 촉구한 말이다. 당시 그리스에는 수사학이 발달했고, 스스로 지혜자를 자처했던 많은 소피스트는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궤변을 일삼았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지식을 자랑하고 논쟁을 일삼는 그들에게 따끔한 일침인 셈이다.

 
필자는 지난 주일 시편 19편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라는 구절을 묵상하다가, 인간의 무지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자기 허물을 능히 누가 깨닫겠는가?’라는 질문은 그것이 쉽지 않음을 방증한다. 
 
가수 김국환의 노래 ‘타타타’는,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로 시작한다. 그 다음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로 이어진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라서 더 묘미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미리 알았으면 가지 않았을, 선택하지 않았을 일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가? 어차피 알 수 없는 인생이니 그렇게 위안 삼을 뿐이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가 아니라 “나도 나를 모르는데”로 가사를 바꾸었으면 더 깊은 의미를 담아내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너라고 나를 알겠느냐”가 훨씬 우리 스스로 모르는 인생임을 잘 드러낸다. 
 
여하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른다. 우리 몸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몸에 암 덩어리가 자라고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자각할 때에는 이미 병이 깊어질 때다. 자기 몸의 상태를 잘 알려면 평소에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해봐야 한다. 그러다 전혀 몰랐던 내 몸의 상태와 문제를 발견하게도 된다. 자가 진단만으로는 안 된다. 
 
더구나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실체를 모르고 사는 경우도 많다. 다른 사람들은 다 문제가 있음을 아는데, 정작 자기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평생을 살기도 한다. 많은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면서도 정작 자신을 그것을 모른다. 진짜 “영 몰라, 통 몰라, 심지어 가르쳐줘도 몰라”이다. 
 
그럼 어떻게 우리의 자신을 더욱더 잘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진단 도구인 동시에 수술 도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성경 말씀을 진지하게 읽어가다 보면 자신의 실체를 더욱 잘 알 수 있게 된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참 연약하고 비참한 죄인임을 알게 된다. 지금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죄를 짓고 산다. 기억조차 못하는 무심코 내뱉은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구에게는 큰 상처와 손해가 되기도 했다. 때로 알면서도 짓는 죄도 크다. 우리 안에 도사린 죄의 암 덩어리는 몸의 암 덩어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른다는 겸손함과 함께 절대자 앞에 단독자로 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성경은 우리의 실체를 폭로함과 동시에 온갖 죄와 비참에서 벗어날 길도 제시한다. 성경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인생의 변화를 경험한 이들이 많다. 이 가을,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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