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사마리아지역을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려고 할 때였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에 속한 어느 마을에 들어갔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예수 일행을 환대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었기 때문이었다(누가복음 9:53).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일으키는 정서적 반응은 매우 적대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의 질서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었다.
 

  앗수르제국의 침공 이후에 이방인들과 피가 섞였다고 해서 예루살렘의 옛 질서는 그들을 철저하게 이방인 취급을 하고 교류를 단절하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북부 갈릴리 지방에서 남부 유대지방으로 여행을 할 경우 사마리아를 관통하지 않고먼 거리를 돌아서 여행을 하곤 했다.
 

  유대인들로부터 사람 취급도 못 받는 사마리아인들의 마음에 불인두로 지진 상처처럼 아프게 새겨진 것이 소외감이었다. 그러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 일행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들은 과거를 극복하지 못한 채 마음에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라할 수 있는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인들의 반응을 보고 분노가 폭발했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누가복음 9:54). 과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씩씩거리는 제자들이나 영적으로 미숙한 것은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시고는 다른 마을로 향하셨다(55-56).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는 예수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냉대에 상처받지 않았다. 우리가 누군가의 반응에 상처를 입는 것은 보통 ‘자존심’ 때문이다.
 

  그래서 그 상한 자존심에 상응하는 대가를 되갚아 주어야 속이 시원하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야” 억울하고 분한 생각은 편안한 잠도 빼앗아간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기차가 막 출발하려는 데 어떤 사람이 플랫폼에서 애타게 ‘슐레겔’을 불렀다. 한 사람이 궁금해서 열차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부르던 사람이 달려와 느닷없이 뺨을 한 대 때리고 가버렸다. 얼떨결에 뺨을 맞은 사람은 창문을 내리더니 배를움켜잡고 웃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이들에게 그는 말했다. “저 바보, 내가 슐레겔인 줄 알았나봐….” 성내고 억울해 하고 토라져봐야 결국 상처를 입는 것은 자기 자신일 뿐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화를 내거나 잘못을 저지를 때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 침착하게 자기 마음을 잘 살펴볼 수 있다면 성숙한 사람이다. 사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생각할수록 화나네.” 1세기의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티투스는 그런 경우를 만날 때마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마음의 평정을 얻으려면 이 정도는 지불해야겠지.” 시도 때도 없이 화내는 사람은 내적인 여백이 적은 사람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언 16:32.)

저작권자 © 평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